히스토리아

금입택(金入宅) 본문

국사써브노트

금입택(金入宅)

엠알페이지 2007. 9. 18. 16:59
SMALL

금입택(金入宅)

신라시대 귀족들의 주택. ‘쇠드리댁’ 또는 ‘금드리댁’을 직역한 말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편 진한조(辰韓條)에 “신라 전성 시대에 수도인 경주에는 17만 8936호가 살았고, 행정 구역은 1,360방(坊), 55리(里)로 나뉘었으며, 금입택이 35채 있었다.”라고 했는데, 실제는 39채가 기록되었다.

신라의 전성 시대란 삼국통일 이후 약 100여 년 간인 중대(654∼780)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성 시대는 경주가 수도로서 가장 번성했던 신라 말기, 즉 헌강왕 때이다.

금입택은 대체로 신라 중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신라 말기에 이르러 전성 시대를 구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금입택은 이름난 것만을 기록했을 것이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경주의 집들은 모두 기와로 지붕을 이어 초가집이 없었고 밥을 짓는 데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숯을 썼으며, 처마와 담이 연이어 노랫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을 정도로 경주는 소비도시로 번창했다.

신라는 9세기에 들어와 엄청나게 늘어난 금(金)의 수요를 억제하기 위해 806년(애장왕 7)에 금·은으로 용기를 만드는 것을 금지했고, 834년(흥덕왕 9)에는 교서를 내려 진골 귀족인 경우에도 용기·거기(車騎)·옥사(屋舍) 등에 금을 사용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그런데도 금을 입힌 저택이라는 의미의 금입택이 경주 곳곳에 들어섰던 것은, 그 택주들이 단순한 부호들이 아니라 왕권에 비견될 만한 유력한 진골 귀족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 839년에 신무왕이 즉위할 때까지 격심한 왕위 계승 쟁탈전을 겪었고, 그로 인해 국가 권력이 매우 약화되어 진골 귀족에 대한 사치 생활 금지령을 강제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금입택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유신의 종가로 생각되는 재매정택(財買井宅), 불교사원에 시주한 사실이 확인되는 수망택(水望宅)·이남택(里南宅)·북택(北宅) 등이 있다.

LIST

'국사써브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술교육  (0) 2007.09.18
기기창(機器廠)  (0) 2007.09.18
금위영(禁衛營)  (0) 2007.09.18
금오신화(金鰲新話 )  (0) 2007.09.18
금양잡록(衿陽雜錄)  (0) 2007.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