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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

엠알페이지 2007. 9. 1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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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

고구려 멸망 후, 당(唐)의 지배에 저항하여 고구려를 재건하려던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

당나라는 평양서을 함락시키고668)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薛仁貴)를 안동도호로 삼아 고구려의 고토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고구려 전역을 9도독부, 46주, 100현으로 나누어 실질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함과동시에 고구려인의 저항을 방지하기 위하여 고구려인 2만 8000여 호를 중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당의 이러한 지배 정책도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 유민의 투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검모잠(劍牟岑)과 안승(安勝)이 주도하였던 고구려 부흥운동이었다.

669년 검모잠은 궁모성(窮牟城)을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켜, 왕족인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고 당군에 저항하였다. 이들은 다시 한성(漢城:지금의 재령)으로 나와 근거지를 정하고, 당군을 공격하는 한편 신라에 구원을 청했다.

당시 신라는 백제의 옛 땅에서 당군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당군을 분산시키기 위해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670년 고구려의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건너 당군과 싸우기도 했다.

이에 당은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을 보내 고구려 부흥군을 공격했다.

671년 고구려 부흥군의 전초기지였던 안시성이 당군에게 함락되고, 672년 백수산(白水山) 전투에서 당군에게 대패하자, 고구려 부흥군은 673년 호로하(瓠瀘河)에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부흥군의 내부에서는 의견의 대립으로 분열,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패배한 고구려 부흥군은 대부분 신라로 넘어갔으며, 이때 안승도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익산)로 옮겼다. 이후 신라는 안승을 보덕국왕(報德國王)에 봉하고, 투항한 고구려 유민과 더불어 당군과의 치열한 격전을 치룬 끝에 당군을 평양 이북으로 몰아냈다.

안승이 주도하던 부흥운동은 실패했지만, 각 지역에서는 고구려의 유민이 아직 당군에 저항하고 있었고, 한편으로 신라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패배를 거듭한 당은 결국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신성(新城:지금의 무순)으로 옮겨갔다.

아울러 당은 보장왕을 요동에 보내어 고구려 유민을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보장왕이 고구려 부흥을 꾀하다가 발각되자 다시 그를 당으로 소환하고, 고구려 유민을 다시 대거 당의 내지로 이주시켰다. 이후 고구려 유민은 뿔뿔이 흩어져 신라로 투항하거나 동만주지역으로 이주했다. 동만주로 옮겨간 유민들은 후일 발해건국의 기반이 되었다.

금마저(金馬渚郡) : 전라북도 익산시의 백제시대 이름

보덕국(報德國) : 고구려 멸망 후 신라의 원조 아래 고구려 유민이 지금의 익산지방에 세운 고구려 유민의 나라.

존속기간 670(문무왕 10)∼684년(신문왕 4). 왕은 안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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