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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약조(癸亥約條) 세견선(歲遣船) 왜관(倭館)

엠알페이지 2007. 9. 1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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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약조(癸亥約條) 세견선(歲遣船) 왜관(倭館)

계해약조(癸亥約條)

1443년(세종 25) 첨지중추부사 변효문(卞孝文)이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정성(宗貞盛)과 세견선(歲遣船) 등 무역에 대해 맺은 조약.

내용은 세견선은 50척으로 할 것, 삼포에 머무르는 사람의 체류기간은 20일로 하며 상경자(上京者)의 배를 지키는 간수인은 50일로 한해 이들에게 식량을 지급할 것, 좌선인(坐船人)수는 대선(大船) 40명, 중선 30명, 소선 20명으로 한할 것, 고초도(孤草島)에서 어획하는 자는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의 문인(文引)을 받아 어세(漁稅)를 낼 것 등이었다. 왜인이 개항장에 도착한 후부터 본국으로 귀환시까지 비용은 조선측이 부담했는데, 그 접대비용과 세역미두가 너무 많아 재정긴축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같은 긴축정책은 앞서 마련된 법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예외취급이 너무 빈발해서, 왜인들은 이를 위반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등 모순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이후 삼포왜란(三浦倭亂)의 원인이 되었다.→ 삼포왜란

세견선(歲遣船)

조선시대에 일본의 각 지방으로부터 교역을 위해 해마다 도항해온 선박. 연례송사(年例送使)라고도 한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왜구를 막기 위해 회유적인 교류와 통제정책을 실시했는데,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 이후 왕래가 끊어졌다.

그뒤 대마도주(對馬島主) 무네씨[宗氏]의 간청으로 다시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무역과 어획을 허락하고 1443년에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었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1512년에 임신약조(壬申約條)를 맺어 대마도주에게 주는 세사미(歲賜米)와 세견선의 수를 반감했다.

임진왜란 후에는 한동안 단절되었으나, 1609년(광해군 1)에 기유약조(己酉約條)에 의해 일본과의 통상을 대마도주에게 한정시키고 세견선을 20척으로 축소하는 등 규제를 가했다.

세견선의 왕래는 무역을 목적으로 했지만, 모든 선박에 반드시 외교문서인 서계(書契)를 가져와야 했으며 정관(正官)이 승선하여 외교적인 절차를 밟아야만 교역이 가능했으므로 조공(朝貢) 형태의 무역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왜관(倭館)

조선시대에 왕래한 왜인의 숙박이나 접대 등에 관한 일과 이들과의 무역을 도모하기 위해 남해의 개항장과 서울에 설치한 관사(館舍).

고려 말 이후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태조와 태종은 회유책을 써서 이들을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시키고자 왜인의 왕래를 허락하였다.

그 뒤 아무 곳에나 무질서하게 정박하는 왜인들을 통제할 필요가 있어, 태종은 1407년 동래의 부산포(富山浦)와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 薺浦)를, 1418년(태종 18)에는 울산의 염포(鹽浦)와 고성군의 가배량(加背梁)을 개항해 이곳에만 정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듬 해(세종 1)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개항장은 폐쇄되었다. 그 뒤 대마도 도주(島主, 守護)인 소(宗貞盛, 都都熊丸)의 간청으로 1423년에는 부산포와 내이포, 1426년에는 염포에 왜인의 내왕을 허가해 삼포(三浦)가 개항되었다. 왜관은 이 개항장에 설치된 것으로, 여기에서 교역·접대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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