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기자조선(箕子朝鮮) 본문
은나라가 망한 후 동쪽으로 망명하여온 기자(箕子)와 그 자손들이 40여 대에 이르도록 왕을 지냈다고 하는 고조선의 일부 시기라고 추정했던 국가이다.
전통적인 상고사 인식체계에서는 고조선이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고학이 발달하면서 현재는 고고학적 발견이 없어 기자조선의 실체를 부정하고 있다.
설사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고대사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 아래는 기자동래설에 대한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기자동래설이란 고대 중국 주나라 초기인 BC 1122년에 은나라 왕족 출신인 ‘기자’라는 인물이 주나라 무왕의 책봉을 받고 우리나라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조선을 문명개화하였다는 설이다.
사대주의에 물젖은 고려와 조선시대 지배층들은 기자동래설을 사실이라 믿고, 기자숭배 사상을 퍼뜨렸다.
과연 기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중화문물을 전달했고, 그 결과 우리나라가 문명개화했는가? 기자동래설이 특히 문제로 되는 것은 최근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기자동래설을 근거로 고조선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동래설의 연원
기자동래설이 처음 나온 것은 기원전 3세기말~기원전 2세기 초 중국의 역사책인 <상서대전>이다. 이 책에서는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자…. 기자가 갇힌 것을 풀어주었는데, 기자는 주나라가 석방해 준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다 하여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를 듣고 그 기회에 조선(후)로 그를 봉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 후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는 기자이야기가 없고, 송미자 세가에 “은나라 주(왕)가 음란한 짓을 하니 기자가 충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 미친 채 하고 종이 되었다. … 무왕이 은나라를 이긴 다음 기자를 방문했다. …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기자는 그의 신하로 되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이렇게 해서 기자동래설이 중국 땅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한나라의 역사학자인 반고(班固, AD 32~92))의 <한서>에서는 이를 더욱 윤색해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의와 농사짓기, 누에치기, 천짜기를 가르쳐 주었다’고 까지 하였다. 후대에 올수록 중국의 역대 사가들은 기자동래설을 더욱 요란하게 각색했는데, 1607년에 중국 명나라 왕기가 편찬한 <삼재도회>에서는 기자가 수천명의 기술자들을 데리고 조선에 가서 조선을 문명한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는 말까지 더 꾸며내어 써놓았으며, <위략> <삼국지>에서는 후조선 말기의 왕들을 기자의 후손이라고까지 했다.
중화사상에 빠져있던 우리나라 역대 유학자들도 중국에서 어진 사람으로 유명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전조선(단군조선)을 뒤이은 후조선을 세우고 우리나라를 문명하게 해주었다고 믿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조차 했다. 사대주의 역사학자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기자가 조선후로 책봉 받았다’고 했고,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도 단군조선 뒤에 기자가 와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한편 고려왕실에서는 숙종7년(1102년)에 그의 무덤을 찾아내고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1325년 충숙왕 12년에는 기자사당을 세워 때때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 후 이조시기에 이르러 유교가 더욱 성행하면서 유학자들 속에서 기자 숭배사상이 더욱 고조됐다. 그들은 ‘기자지’ ‘기자실기’ ‘ 기전고’ 등 이른바 기자의 사적에 관련된 책들을 편찬했으며, ‘진단통기’와 같은 데서는 ‘기자’가 태어난 해, 조선에 온 해, 왕으로 있은 해수, 나이까지 상세히 꾸며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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