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김사미와 효심의 난 본문

국사써브노트

김사미와 효심의 난

엠알페이지 2007. 9. 18. 19:33
SMALL

김사미와 효심의 난(金沙彌 孝心 亂)

1193년(명종 23) 경상도 청도에서 김사미가 일으킨 반란. 12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려의 귀족지배체제는 점차 동요하기 시작해,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수립되자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정치는 일단 종식되었다.

무신정권은 약 1백년간(1170∼1270) 존속하지만 무신 집권 초기의 정국은 매우 혼란하고 불안정해, 과중한 수탈과 고된 생활에 지친 농민과 천민들은 이 틈을 타서 전국적으로 큰 민란을 일으켰다.

민란은 무신정권의 전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발생했으나, 그 규모나 양상이 가장 크고 격렬한 것은 무신정권 초기의 약 30여 년간에 걸쳐 일어난 삼남(三南) 각지의 민란이었다.

1170년(의종 24) 무인의 난 이후 농민과 천민의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것은 집권 무인의 토지 겸병(兼倂)과 지방관리들의 수탈 등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농민생활이 빈궁해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꾸준히 민중들의 지위와 의식이 성장하는 한편, 무인정치의 불안정으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어 촉발되었다. 이러한 민란은 무인정권 전기간에 걸쳐 발생했으나, 특히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것은 무인정권 초기인 명종·신종대 30여 년간에 걸쳐 일어난 삼남(三南) 각지의 민란이었다.

이런 민란의 대표적인 것이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다.

김사미((金沙彌 )의 난

1193년(명종 23) 경상도 청도에서 김사미가 일으킨 반란.

경상도 청도의 농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사미가1193년 청도군 내의 운문(雲門)에 본거를 두고 부근의 농민, 특히 유망농민(流亡農民)을 규합해 강력한 반란군을 조직하여 당시의 정부인 무인정권(실권자 이의민)에 반대하는 큰 민란으로 치닫게 하였다.

1193년 7월 김사미와 효심이 중심이 된 대규모의 민란으로 폭발했다. 김사미는 운문(雲門:지금의 청도)에, 효심은 초전(草田:지금의 울산)에 근거지를 두고 신라 부흥을 표방하며 신라의 유민과 부근의 농민(農民)을 규합해 각 지방을 누비며 극렬한 항거를 전개했다. 김사미와 효심의 반란군은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작전도 상의하여 연합전선의 태세를 갖추는 등 크게 기세를 떨쳤다.

이 무렵에 경상도·전라도·양광도에서는 기근으로 민심이 매우 소란하였고, 1190년부터는 동경(東京 : 慶州)에서 일어난 민란을 비롯해서 이른바 ‘남적(南賊)’의 폭동이 남부지역에서 널리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반란군은 조정에서 보낸 대장군 전존걸() 휘하의 토벌군 장군 가운데 역시 신라 부흥을 꿈꾸는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이 반란군에 밀통해옴으로써 토벌군의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그 공격을 미리 방어하였다.

이듬해 조정에 의하여 다시 파견된 남로착적병마사(使) 최인(), 도지병마사(使) 고용지()에게 진압되어 김사미는 투항, 참수되었다.

이 난이 발생, 진행, 진압되는 과정에는 이에 대처하는 정부와 이의민의 미묘한 처지가 매우 복잡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사미를 포함한 당시의 농민반란군 지휘자들이 조직적 훈련이 부족한 농민과 천민을 규합해서 큰 저항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주목된다.

동경민란(東京民亂)

고려에서 1190년(명종 20)부터 1204년(희종 즉위)까지 동경(東京 : 지금의 경주)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농민봉기.

1170년(의종 24) 무인난 이후 집권무인의 토지겸병과 지방관리들의 수탈 등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농민생활이 빈궁해지고 그 속에서도 꾸준히 민중들의 지위와 의식이 향상됨에 따라 농민과 천민의 반란이 전국 각지에서 치열하게 일어났다. 동경민란은 당시의 봉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다. 흔히 '남적'(南賊)으로 표현되는데, 기세가 대단하여 정부의 몇 차례 토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1193년(명종 23) 운문(雲門 : 지금의 청도)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 : 지금의 울산)의 효심(孝心)이 일으킨 봉기였다.

남적(南賊)

고려시대 농민봉기를 지칭하는 용어.

지역적으로 개경 이남의 봉기 가운데 일부를 당시 기록에서 남적이라 했다.

이 용어는 1174년(명종 4)에 일어난 서경지역의 조위총(趙位寵) 봉기가 진압된 후 그 남은 무리(餘衆, 혹은 遺種)가 1177~79년 서북지역 일대에서 일으킨 봉기를 서적(西賊)이라 한 것에 대비되는 용어이다.

LIST

'국사써브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홍집내각  (0) 2007.09.19
김헌창의 난(金憲昌의 亂)  (0) 2007.09.19
김보당의 난(金甫當―亂)  (0) 2007.09.18
기호홍학회  (1) 2007.09.18
기호학파(畿湖學派)  (0) 2007.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