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균전론 여전론 한전론 본문
균전론(均田論)
조선 영조 때에 실학자(實學者) 이익(李瀷)이 주장한 토지개혁론(土地改革論).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 이익은 《성호잡저(星湖雜著)》에서 '백성들은 날로 궁해지고 곤란해졌다. 국가의 위정자는 이와 같은 토지 겸병의 폐단을 제거하는 길로 균전제의 실시에 유념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였다.
여전론(閭田論)
조선 후기에 정약용(丁若鏞)이 주장한 토지개혁론. 일종의 협동농장제로서 전국의 토지를 국가소유로 하고, 농촌사회를 여(閭) 단위로 재편성한 다음 공동경작하여 노동량에 따라 소득분배하자는 공동농장제도이다.
1799년(정조 23)에 간행된 시문집 <<여유당전서>>에 실려 있으며, 정전론(井田論)과 함께 정약용의 대표적인 토지개혁론이다.
여는 지세를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나눈 최하의 단위인데 보통 30호로 이루어졌으며, 3여는 1리(里), 5리는 1방(坊), 5방은 1읍(邑)이었다. 여는 여장(閭長), 리는 이장(里長), 방은 방장(坊長), 읍은 현령(縣令)이 다스렸으며, 세액은 여러 해 동안의 수확평균치로 정하였는데 대개 10분의 1이 원칙이었다.
한전론(限田論)
이익의 전제 개혁론.
전주는 국가의 토지를 일시적으로 빌려가는 것이며 절대적인 소유권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즉, 토지의 균등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토지개혁론이다.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토지를 일정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근대사회에서의 토지는 국가경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고려 말기에서 조선 말기까지 학자· 관료들에 의해 정전론(井田論)·균전론(均田論) 등 토지개혁론이 대두되었다.
그 가운데 한전론은 토지겸병을 억제하고, 무농·빈농층을 자영농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겸병이 계속되고, 정부의 소극적인 정책으로 말미암아 농촌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