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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항일운동, 광주민주화운동

엠알페이지 2007. 9. 17.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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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항일운동(光州學生抗日運動)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투쟁운동.

광주에서 기차통학을 하던 한· 일 학생 사이의 싸움이 도화선이 되어 광주의 2,000여 명의 학생이 궐기하였다. 점차 일반 시민들이 합세하여 광주학생시위의 여파는 마침내 전국으로 번졌다. 3· 1운동 이후의 가장 거센 항일운동으로, 이 운동에 참가한 학교는 194개 교, 참가 학생 수는 5만 4,000여 명이었다. 이 운동은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은 20년대 학생운동의 한 정점이었으며, 일제 강점하 최대 규모의 학생항일운동이었다. 이에 53년부터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해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光州民主化運動)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정수립,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과 12·12사태를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

공식명칭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암살되고 유신체제가 붕괴되면서 한국은 민주화를 향한 정치적 격변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유신체제의 전 기간을 통해 억압받아온 민주주의와 생존권에 대한 열망은 기존의 집권세력을 위협하면서 급격하게 확대되어갔지만, 12·12사태를 계기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은 최규하(崔圭夏) 과도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다가 사북사태로 대표되는 노동자 생존권의 문제로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시위 등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신군부세력을 위협하자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했다. 집권세력은 그들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분출되는 국민들의 저항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면서 민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투옥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시민들은 집권세력에 의해 폭도로 매도당한 채 고립된 속에서 군의 잔악한 진압과 학살에 대응하기 위한 자위적 무장을 갖추고 이후 10일간의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군의 대대적인 폭력진압으로 민주화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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