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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학파(江華學派)

엠알페이지 2007. 9. 9.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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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학파(江華學派)


정제두를 시조로 하여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특한 학문적 경향을 가진 학파.

흔히 강화학파의 학문적 경향은 양명학으로 이해된다.

(중국의 양명학과는 다르며 단순히 양명학에 그치지 않는다.)


양명학의 전래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16 세기 말 이미 양명학의 저술인 전습록(傳習綠)이 전해졌고, 이황이 이에 대한 비판을 한 바 있었다.

성리학의 열기로 그 연구가 뚜렷하지는 못하였으나 성리학의 교조성에 반발한 일부 학자들은 이에 관심을 보였으니, 남언경(南彦經), 이항복(李恒福),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드러내 놓고 양명학을 논하지는 못하고 은밀히 전승하였는데, 그것은 양명학이 정통 성리학자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양명학이 학문적 체계를 수립하고, 하나의 학파를 이룩한 것은 17 세기 말, 18 세기 초의 소론 출신인 정제두(鄭齊斗)에 의해서였다.

그는 맹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양명학적 심학관(心學觀)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주자와 대립된 입장에서 심즉리(心卽理)설을 제시하고, 일체의 학문이 양지(良知)를 파악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학설의 체계화와 아울러, 후진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강화(江華)를 근거지로 하여 이광사(李匡師) 등 많은 제자를 두어 강화 학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광사는 이긍익(李肯翊) 등으로, 다시 이면백, 이시원을 거쳐 19 세기 말에는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박은식(朴殷植) 등으로 그 학맥이 이어졌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론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 실천성이 강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성리학과 함께 고증학의 비판을 받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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