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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운양호사건 雲揚號事件)

엠알페이지 2007. 9. 9.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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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운양호사건 雲揚號事件)]

1875년(고종 12)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의 강화해협에 불법침입하여 포격을 가하고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한 사건.

운양호사건이라고도 한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한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한 첫 단계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며, 한반도를 침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한편, 조선정부에도 그토록 강경한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년 12월부터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면서, 민씨척족세력이 집권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한반도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일본에게는 고무적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운요호포격사건은 근대제국주의적 영토팽창주의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전쟁의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운요호의 강화해협침입 자체가 영토침략 또는 주권침해행위이기 때문이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조선의 국방안보상 가장 중요한 보장지중지(保障之重地)의 해상관문이다. 멀리 고려시대의 40년에 걸친 대몽항쟁(對蒙抗爭)을 벌인 군사적 근거지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던 곳이다.

그러기에 강화도 전체를 요새화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 왔던 것이다. 특히, 1866년 프랑스의 내침(병인양요), 1871년 미국의 내침 (신미양요) 등 19세기 후반기 구미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일본의 무력 앞에 무기력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일본에서는 다시 정한론이 대두하여 운요호사건에 대한 조선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내세우면서 일본정부는 강압적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운요호사건은 일본의 한반도침략의 일환으로 계획되었으며, 일본은 불평등조약 체결을 계기로 조선식민지화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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