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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사상(開化思想) 개화파(開化派)

엠알페이지 2008. 4. 12.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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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사상(開化思想) :

19세기 중엽 이후의 근대 국가·사회 건설을 지향하던 부르주아 개혁사상.

개화사상은 19세기 중엽의 민족적 위기를 당해 나라와 백성을 자주적으로 근대화하고 변혁해서 진보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는 안으로는 봉건사회의 낡은 틀을 부수고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개화사상은 이러한 국내의 봉건적 모순을 자각하고 세계 역사발전의 방향에 따라서 내외정치를 개혁하려던 개혁사상이었다.

개화사상의 내용은 당시 조선왕조 사회가 당면했던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고 자주 부강한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해, 나라의 자주독립과 발전을 실현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화사상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하였다.

1874∼1884년의 초기 개화사상은 아직도 주로 양반 출신과 중인 출신의 소수의 청년 지식인들만이 갖고 있던 사상이었으며, 국민들에게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초기 개화파는 청국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크게 침해하자 먼저 정권을 장악해 정부의 권력으로 개화사상에 의거한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려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변의 수행조차도 개화파의 힘이 부족해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을 차용해서 부족한 힘을 보충하려다가, 이것이 도리어 정변 실패 주요인의 하나가 된 형편이었다.

초기 개화사상의 영향은 갑신정변 시기가 아니라, 10년 후에 이르러서 온건 개화파들이 집권해 갑오경장을 실시할 때 비로소 개혁 정책의 정립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후기 개화사상인 독립협회의 사상도 당시에는 전면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주로 도시민과 청년층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과 결합한 정도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개화사상의 형성과 발전의 영향으로 개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채택되기도 하고 대소규모의 개화 운동이 전개되기도 해, 1904년까지 자주 근대화가 부분적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개화사상은 1905년 일제의 ‘을사5조약’ 강요에 의해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전후에는 국권 회복의 일차적 목표와 관련해 개화사상은 애국계몽사상과 운동으로 전환되어 전개되었다.

개화파(開化派) :

19세기 중엽 이후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위로부터 부르주아적 개혁'을 실현하려던 정치집단.

초기 개화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조선 후기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와 중인 출신의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일명 유대치)였다.

이들이 생각한 조선의 일대혁신이란 "문호를 개방하여 세계의 추세에 적응하는 정치적 혁신을 꾀하고 서구의 선진문화를 도입하고 상공업을 발전시켜 나라의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부르주아적 개혁"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은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일대혁신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그 대안으로서 '우선 동지를 북촌(당시 서울에 있던 고관양반들의 집단거주지)의 자제 가운데서 구하여 혁신적 기운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당시 이들이 지목한 구체적 대상은 김옥균(안동김씨 부사 김병기의 양자)·박영효(판서 박원양의 아들이자 철종의 사위)·박영교(박영효의 동생)·서광범(참판 서상익의 아들)·서재필(서광범의 조카)·김윤식·김홍집·홍영식·유길준·어윤중 등이었다.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에 의해서 싹트기 시작한 개화사상은 이들 청년지식인들에 의해 더욱 풍부해지고 발전하였다. 따라서 개화사상은 1870년대를 전후하여 형성·발전되었고, 이를 통해서 조선의 일대 혁신을 실현하려는 정치세력으로서 개화파도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개화파는 개화의 방법과 청·일에 대한 외교문제를 둘러싸고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뉘었다.

김홍집·김윤식·어윤중 등의 온건개화파는 민씨일파와의 타협 아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적 과학기술문명만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개혁을 하자는 입장이었다. 또한 청과의 외교도 종래대로 사대외교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의 급진개화파는 서양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서양의 근대적인 사상, 제도까지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수구반동적인 민씨일파는 타협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었다. 이런점에서 급진개화파에게는 민씨정권을 지원하던 청과의 사대외교 청산문제는 개화 실현의 관건적 문제였다. (급진개화파를 개화당이라고도 함)

그런데 1882년 군인폭동(임오군란)을 계기로 민씨 정권이 친청정책을 강화하고 그나마 실시하였던 개화정책에서 후퇴하게 되자 개화파는 정변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884년 5월 안남문제를 두고 청·불전쟁이 발생하여 서울에 주둔했던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고 그에 따라 일본이 개화파에 접근하자, 개화파는 1884년 10월 정변(갑신정변)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변은 청과 민씨정권에 대한 과소평가, 일본의 배신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그들의 개혁사상의 한계로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개화파가 지향하던 개화사상과 그 구체적 내용은 그들이 정변에 성공 뒤 구성한 새로운 정부의 '신정강'에서 잘 드러난다. 신정강의 내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김옥균이 남긴 갑신일록의 정강을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갑신정변 참조>

한계 :

당시 해체되고 있던 봉건적 토지 소유 문제를 어떤 형태로 개혁하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사회가 근대적 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핵심이었다.

이런점에서 개화파는 지주제를 그대로 인정한 위에서 세제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지주를 새로이 전개될 근대사회의 건설주체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즉 이들은 구래의 지주적 토지소유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이를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시켜 나갈 구상이었다.

개화사상의 이러한 측면은 위정척사파와는 질적으로 다른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문제에 가장 철저한 이해관계를 가진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함으로써 정변이 실패하는 역사적 한계를 갖게 하였다.

또한 지주적 토지소유를 옹호하는 개화사상의 이러한 측면은, 당시 지주제의 존속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사회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구미 열강과 투쟁할 내적 근거를 박약하게 하였다.

때문에 개화파는 서구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구미 열강의 본질인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갑신정변이 일본을 이용하려던 개화파의 주관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배반으로 실패한 것은 결국 침략자의 본질을 원조자로 잘못 인식한 데 있었다.

개화사상은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던 부르주아적 개혁사상이었고, 또한 당시 세계발전의 역사적 추이를 인식한 선진적인 사상이었다.

그러나 개화파의 대다수가 양반관료이자 대지주 출신이라는 계급적 제한성은 지주적 입장을 옹호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게 하였고, 그들이 개혁의 모델로 삼은 일본과 구미열강의 침략성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한계를 가졌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급진개화파는 사라졌지만, 개화사상이 지향한 개혁의 방향과 한계는 근본적인 변화없이 갑오개혁과 그후의 독립협회파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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