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개화당(開化黨) 수구당(守舊黨) 본문
개화당(開化黨) : 독립당
개화사상의 비조인 오경석, 박규수, 유홍기 등의 영향과 교육을 받고, 1874년경부터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등이 중심이 되어 개화 정책을 추구한 정치집단.
1874년(고종11)경부터 김옥균(金玉均)·박영교(朴泳敎)·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중심이 되어 개화 정책을 추구한 정치 집단.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모방해 급진적으로 개화 독립할 것을 주장하던 개화독립당(開化獨立黨)으로 수구당과 대립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힘을 빌려 정권을 쟁취하고, 청나라의 간섭에서 탈피해 진보적 내정개혁과 부흥을 꾀하려하였다.
수구당(守舊黨) : 사대당
조선 말기 조선 정계 내에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청나라에 의존하면서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해갈 것을 주장하던 보수적 정치집단. 사대당(事大黨)· 사대수구당이라고도 한다.
수구당의 중심 인물로는 민태호(閔台鎬)·민영익(閔泳翊)·민영목(閔泳穆)·민종묵(閔種默)·윤태준(尹泰駿)·한규직(韓圭稷)·이조연(李祖淵)·조영하(趙寧夏)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민씨의 척족이거나 그에 결탁한 인물들로서 대원군 세력을 추방하는 데 선두에 나섰으며, 군사권·재정권을 장악하면서 조정을 좌우해 나갔다.
개화당과 수구당과의 관계
수구당은 대원군 실각 이후 정권을 장악, 개국주의 정치를 해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을 당해 위기를 청나라의 도움으로 모면한 뒤에는 적극적인 친청세력(親淸勢力)이 되었으며, 이후 청나라의 노골적인 간섭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 친청수구당은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정권을 전단해 국정을 문란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의 알선으로 당오전(當五錢)이라는 화폐를 만들어 악성 인플레이션을 야기시키는 등 경제계의 혼란도 초래하였다.
이처럼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민씨정권의 친청수구정책은 날로 횡포를 더해갔고, 청국은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획책함에 따라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는 높아져갔다.
이에 따라 개화파는 정변을 통해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할 것을 결정했다. 마침 월남문제를 둘러싸고 청-프랑스 전쟁이 터져 청국이 패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간섭이 약화되고 또 임오군란 이후 냉담했던 일본공사가 다시 접근해왔다.
개화파는 일본공사관의 후원을 확인하고 계획대로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갑신정변)
이 정변에서 수구당 요인인 민영익이 중상을 입었고, 민태호·민영목·조영하·윤태준·한규직·이조연 등이 살해당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청병(淸兵)의 무력간섭으로 개화당의 혁신정부 수립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갑신정변은 바로 이들 양당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란이었다.
개화당 세력을 제거하고 3일만에 다시 정권을 장악한 수구당은 더욱 보수적이 되었다. 청나라의 세력이 한층 강대해지면서 조선을 둘러싼 청·일 양국의 쟁탈전 또한 격화되었다. 그러나 친청수구세력들은 구정치질서에 의한 체제유지에만 급급했을 뿐 문란한 내정의 개선이나 정국의 쇄신, 또 폐정(弊政)의 시정 등에는 무력하였다.
더욱이 외세의 경제적 침략에 따른 민생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갑오농민전쟁(일명 동학농민운동)을 촉발시키기에 이르렀다.
1894년의 일대 사건을 계기로 다시 등장한 일본은 수구당의 배경인 청나라의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오토리(大鳥圭介)공사를 앞세워 갑오내정개혁방안 등을 제출하였다. 또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로 청나라의 세력이 물러나고 친일파 혁신내각이 조직됨으로써 친청수구당세력은 붕괴하고 말았다.
그러나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러시아의 위력이 두드러지고 일본세력이 위축되자 조선정계에는 다시 친러파가 득세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쟁 중 실권을 상실했던 민씨 일파의 정부에로의 재복귀를 의미하였다. 이어 1896년 2월 국왕의 아관파천(我館播遷) 이후에는 친러수구파 정권이 수립되었다.
조병식(趙秉式)·조병직(趙秉稷)·민영기(閔泳綺)·민영준(閔泳駿)·심상훈(沈相薰)·신기선(申箕善)·이용익(李容翊)·윤용선(尹容善)·이재순(李載純) 등이 중심이 되었고 이들 사대수구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러시아는 조선 정계를 죄지우지하게 되었다.
러시아에게 석탄고기지 설치, 절영도조차(絶影島租借)를 승인해 주었고, 다른 열강들에 의해 서로 각종 이권이 침탈당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무능한 집권정부와 열강의 침략을 비난하였다.
독립협회의 영향력이 커지고 개혁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자 수세에 몰리게 된 집권수구파는 반동적인 황국협회(皇國協會)를 내세워 독립협회를 습격하게 하고 정치개혁운동을 철저히 금지, 탄압하다가 끝내는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사주를 받고 독립협회를 해산시켜버렸다. 이들은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세력이 물러나는 직전까지 정권을 전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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