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서울 암사동 유적 본문
<서울 암사동 유적 (서울 岩寺洞 遺蹟)>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유적지이다.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유적인데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중 최대의 마을단위 유적이다.
3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20여 기의 집터와 딸린시설, 돌무지시설이 드러났다.
서울 암사동 유적은 한강이 곡류하는 지점에 있으며, 강 건너에 아차산이 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고, 여러 차례 불굴 조사를 거쳐 약 50여 기의 신석기 시대 집터와 3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방사선탄소측정에 따르면 B·C 4,000∼3,000년기에 걸친 유적이다. 지금으로 부터 약 6,000년 전의 유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한반도의 중서부 지방을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해 갈돌과 갈판, 그물추, 불에 탄 도토리 등이 출토되어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문화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중용한 자료로 평가된다.
서울 암사동 유적은 1979년 7월 26일 사적 제 267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981∼1988년까지 유적지 발굴조사를 거쳐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확대하였고, 9차에 걸친 복원공사로 신석기 시대 움집이 복원되고 원시생활전시관이 건립되었다. 현재 유적 내에는 복원 움집 9기와 체험움짖ㅂ 1기, 박물관, 선사 체험 마을 등을 조성하였다. 주차장, 산책로 등 편의시설을 완비하여 1988년 8월부터 대중에게 개방되고 있다. ※ 위치 : 서울시 강동구 올림픽로 875 (8호선 암사역 4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정도 소요)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동굴을 이용한 경우도 있으나 움집이 일반적이었다. 움집의 뜻은 일정한 넓이와 형태를 가진 구덩이를 파서 바닥을 땅 밑에 두고 구덩이 안은 별도의 벽체 시설 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게 된 집이다.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해안가 구릉이나 큰 강변의 대지에 지어졌는데, 직경 4∼6m 크기의 원형이나 모를 죽인 방형의 구덩이를 깊이 50-100cm정도 판 다음 화덕자리 등의 내부시설을 마련하고 지붕을 덮었습니다.
암사동 주거지는 바닥을 둥글거나 모서리를 죽인 네모꼴로 팠으며 크기는 길이 5∼6m, 깊이 70∼100cm 정도이다. 집터 가운데에 돌을 두른 화덕자리도 보이며, 입구는 주로 남쪽을 향한다. 기둥구멍은 보통 4개이며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바닥은 아무런 시설이 없거나 또는 진흙을 깔아 다진 것이 있는데 그 위에 풀이나 짐승가죽 등을 깔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덕자리는 돌이나 진흙으로 원형이나 타원 형, 장방형의 테두리를 돌려 집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보온과 취사에 이용되었습니다.
지붕은 움구덩이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한 쪽 끝을 움중앙에 모이게 묶어 골격을 형성하였는데 서까래 아래 사이에 잔나무 가지나 갈대, 억새 등의 풀을 이어 덮었다.
움집의 크기는 보통 작은 움집은 2∼3명, 큰 움집은 5∼6명이 생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터에서 발견된 석기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돌화살촉 · 돌도끼 · 긁개 · 괭이 · 돌보습 · 돌낫 · 갈판과 갈돌, 그물추 등 이며,이러한 유물은 들짐승의 사냥과 가죽을 벗기는 데 쓰였다고 보여지며, 공이는 들짐승의 뼈나 열매 같은 것을 부수는데 그리고 갈판과 갈돌은 도토리알과 같은 열매를 갈아서 가루를 내는데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불에 탄 도토리도 나왔다.
집터에서 발굴된 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