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부여(夫餘) 본문

국사써브노트

부여(夫餘)

엠알페이지 2024. 4. 26. 21:57
SMALL

부여(夫餘) 

서기전 2세기경부터 서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하였던 예맥족의 국가이다. 

훗날  538년부터 660년까지 불린 백제의 별칭인 남부여(南扶餘)와 구분하기 위해 북부여라고도 한다.

<이미지출처 : 우리역사넷>


1. 경제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반농, 반목으로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였다.

2. 정치체제

부여는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북쪽은 선비족, 남쪽은 고구려와 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3세기 말엽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하였고, 최후에는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馬加)·우가(牛加)·구가(狗加)·저가(猪加) 와 대사자(大使者) · 대사(大使) · 사자(使者) 등의 관리가 있었다.

가(加)는 각각 자기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5부족연맹 - 중앙의 왕과 4출도의 가(加))

가(加)들이 왕을 추대하고, 천재지변 시(수해, 한해 등) 흉작이 되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다.(⇒ 집권 국가로서의 한계(왕권 미약) = 연맹왕국 단계)

그러나 왕이 나온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3. 법제

부여의 법에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고조선의 8조의 법과 비슷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4.  풍속

부여의 풍속으로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는데 12월에 열렸으며, 이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제천행사는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하는 의식으로 대부분 농사의 풍요와 성공적인 수렵 활동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우제점법)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5. 역사적 의의

부여는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그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였고, 또 이들의 건국 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출처 : 제7차 고등학교 교과서)

 

 

LIST

'국사써브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예(東濊)  (0) 2024.04.28
초기 고구려  (0) 2024.04.28
초기국가((初期國家)시대  (0) 2024.04.25
예맥(濊貊)  (0) 2024.04.24
한군현(漢郡縣) · 한사군(漢四郡)  (0) 2024.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