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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貢女)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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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貢女)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원(元)·명(明)·청(淸)의 요구에 응하여 여자를 바치던 일. |
몽골이 제1차 침입 직후인 1232년(고종 19)에 왕족과 대관(大官)의 동남·동녀 각 500명 및 공장(工匠)·자수부인(刺繡婦人)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이 그 시초이다. 고려와 몽골 간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몽골은 여러 차례 막대한 숫자의 여자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는 복속정책 내지 근친정책(近親政策)이라는 표면적 이유가 아니라 실제로 원 황실에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고려는 원의 귀족·고관이 요구하는 여자도 보내주어야 했다. 1274년(원종 15)에는 남송 군인의 집단 혼인을 위해 140명의 부녀자를 보내기도 했다. 이를 위해 금혼령을 내리고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하거나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을 파견하여 여자를 징발했다. 원에서 공녀 문제로 사신이 다녀간 것은 1355년(공민왕 4)까지 50여 차례에 달하고, 공납한 처녀는 150명이 넘는다. 이들은 대부분 원나라 궁중에서 급사(給事)나 시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비파를 잘 타서 세조의 총애를 받은 궁인(宮人) 이씨(李氏), 원 인종(仁宗)의 후궁이 되었다가 뒤에 황후로 책봉된 화평군(化平君) 김심(金深)의 딸, 궁녀로 들어가 순제(順帝)의 제2황후가 되어 황태자까지 낳은 기자오(奇子敖)의 딸 등 일부는 귀족이나 고관의 후실이 되어 부귀를 누렸다. 이에 따라 고려인 가운데 딸을 바치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자들이 있었는데, 노책(盧)과 권겸(權謙)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딸을 가진 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딸이 공녀로 뽑히는 것을 피하려 했다. 공녀로 인한 폐단에 대해서 충렬왕 때 박유(朴楡)가 지적했으며, 이곡(李穀:1298~1351)도 그로 인한 민중의 혼란상과 비참상을 극론하고 그 폐지를 요청했다. 민간 사이에서는 조혼(早婚)의 폐습이 촉진되었으며, 원에서는 고려 여인들이 많이 활동하게 됨에 따라 의복·기물·음식 등에 고려의 풍속이 유행하게 되었다. 원에 대한 공녀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끝났으나 원을 이은 명도 공녀를 요구하여 조선은 계속 공녀를 바쳐야 했다. 명은 원과 같이 많은 공녀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명 태조의 후궁으로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은 한비(韓妃)와 영락제(永樂帝)를 낳은 석비(碩妃)는 공녀출신이었다. 명에 대한 공녀는 세종(世宗) 때 완화되었으며, 1521년(중종 16) 하등극사(賀登極使) 홍숙(洪淑)을 보낼 때 그 철폐를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청에 대해서는 1650년(효종 1) 실권자였던 섭정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의 요구로 의순공주(義順公主:錦林君 李愷胤의 딸)를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공녀가 없었다. |
관련항목 : 결혼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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