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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己巳換局) [3] 갑술환국(甲戌換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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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己巳換局) [3] 갑술환국(甲戌換局)

엠알페이지 2007. 9. 1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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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신환국(庚申換局)

조선 숙종 6년(1680),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된 사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선조 연간에 비롯된 조선의 붕당정치는 현종대의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1674년(현종15년)의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득세한 남인이 권력을 강화하자, 그 해에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영향으로 모후의 족질 김석주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숙종의 편당적 조처).

군권(軍權)을 빼앗아 서인에게 주는 등(유악사건) 숙종이 남인을 멀리하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서인은 당시 영의정인 남인의 영수인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과 인평 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셋째 아들, 효종의 동생)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하였다.[삼복의 변(三福之變)] 숙종은 복창군 등 3 형제와 허견, 허적, 윤휴를 사사(賜死)하고 나머지 남인들은 파직, 유배, 옥사시켰다.


이후 정권은 서인에게 넘어갔으며, 남인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 유악(油幄):왕실에서 사용하던 기름칠한 천막 ☞유악남용사건

[2]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년(숙종 15) 숙종이 후궁 소의(昭儀) 장씨(張氏:장희빈)가 낳은 아들을 원자(元子: 세자로 책봉되기 전의 임금의 맏아들)로 정하려는 것을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정권에서 쫓겨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

인현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한 가운데 1688년에 후궁인 소의(昭儀 ) 장씨(장희빈)가 아들 균을 낳자, 숙종은 균을 원자로 삼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봉하려고 했다.

(노론측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이 두 번이나 상소를 올리는 등 경신환국(庚申換局) 이래의 집권 세력인 서인이 이를 반대하자 남인이 송시열의 상소를 논박하였다.

결국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사사(賜死)되고, 서인들은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 이 때 왕자 균을 원자로 삼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을 것을 지지하였던 남인이 중용되어, 이후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甲戌換局) 때까지 집권하게 되었다.

[3] 갑술환국(甲戌換局)


조선 숙종 20년(1694년)에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년) 이래의 집권 세력이었던 남인이 폐비 민씨(廢妃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다가 남인(南人)이 화를 입어 실권(失權)하고, 서인에서 분파된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


남인이 폐비 민씨(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꾀하는 노론의 김춘택, 소론의 한중혁 등을 심문하다가 도리어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축출되었다.


이 때 왕비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장씨는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되었고, 폐비 민씨가 복위되었으며, 이미 죽은 송시열 등 노론에게는 작위가 주어지는 등 기사환국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 갔다.


이 사건 이후 남인은 다시는 세력을 만회하지 못하게 된다.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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