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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흔적

낙랑공주(樂浪公主)

엠알페이지 2007. 2. 24.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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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흔하게 쓰면서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역사상 낙랑공주는여러 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공부하면서 흔히 들었던 낙랑공주 두 명을 알아보기로 하지요.


[1] 하나의 낙랑공주 (樂浪公主)


하나는 낙랑국의 왕인 최리의 딸로
이는 호동왕자와의 비련으로 잘 알려져 있는 낙랑공주이다.
널리 쉽게 알려져 있는 이야기지만 여기서 다시금 정리해 보기로 한다.

호동(好童)은 고구려 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에게서 태어난 소생이다.
호동왕자는 서기 32년 4월 옥저로 놀이를 나갔다가 낙랑국의 왕 최리(崔理)를 만난다.
낙랑국의 왕 최리는 호동의 기개와 용모에 반하여 호동을 데리고 낙랑국으로 간다.
최리왕은 호동에게 낙랑공주를 보여주었다.
호동도 낙랑공주가 마음에 들어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다.
고구려로 돌아온 호동은 부왕(父王)인 대무신왕에게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게 해 달라고 하였다.
부왕(父王) 은 고심 끝에 그 결혼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결혼해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대무신왕은 낙랑국 을 정복하려 그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낙랑국에는 외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울리는 자명고라는 북이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낙랑국을 정복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 자명고를 없애야만 했다.

고구려왕은 왕자 호동을 불러 "네 처에게 낙랑국으로 가서 낙랑국의 자명고를 없애도록 하여라." 라고 명하였다.
왕자 호동은 부왕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아내에게 말했고, 낙랑공주 또한 남편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낙랑공주는 친정인 낙랑국으로 향하게 된다.
오랫만에 친정에 온 낙랑공주를 최리 왕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러면서 최리왕은 고구려 정세에 대한 것을 딸에게 꼬치꼬치 캐어물었다.
낙랑 공주는 속으로 한탄을 하였다.
낙랑공주는 양쪽 나라가 모두 서로 정복하려 벼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을 따르자니 조국이 울고, 조국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게 되는 기로에서 낙랑공주는 한참을 고민하게 되었다.
낙랑공주는 결국 사랑을 택하여 몰래 자명고를 칼로 찢어 버리고 그 사실을 호동왕자에게 알렸다.
이에 왕자 호동은 군사를 이끌고 선봉장이 되어 낙랑국으로 쳐들어갔다.
낙랑국 왕실에서는 자명고가 울지 않아서 고구려가 쳐들어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낙랑국의 백성들은 갑작스런 외적의 침입을 당해 아우성이었다.
낙랑국의 최리왕은 이 소식을 듣고 울지 않는 자명고를 살펴보았다.
자명고는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최리왕은 조사 끝에 낙랑공주를 불러 문초를 한 뒤에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하고 만다.


한편 궁궐까지 쳐들어온 왕자 호동은 낙랑공주부터 찾았다.
그러나 왕자 호동의 앞에는 싸늘해진 낙랑공주의 시체가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왕자 호동은 눈물을 흘리며 고구려로 돌아갔다.
고구려 부왕과 신하들은 왕자의 공을 칭찬했다.
그럴수록 왕자 호동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이때 왕자 호동 앞에는 또 한 가지의 슬픔이 억울하게 겹치게 된다.
부왕(父王)의 원비(元妃)가 호동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시기하여 왕에게 역모를 고해 바치고,

부왕은 호동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호동의 부하들은 부왕 앞에 나가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라고 권했지만, 호동은 듣지 않았다.
"내가 만일 죄 없음이 밝혀지면, 어머니(元妃)의 악함이 드러나게 되오. 그러면, 나는 어머니를 배반하는 일이 되고 부왕에게는 근심을 끼치는 일이 되오."
호동 왕자는 끝내 한 많은 일생을 자결로 마쳤다고 전해진다.

(여기서의 낙랑은 중국 군현의 하나인 낙랑군으로 보지 않고, 평양에 근거를 둔 독립세력인 낙랑국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출전: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제2(高句麗本紀第二) 대무신왕(大武神王)'

[2] 또 하나의 낙랑공주


고려 태조 왕건에게는 9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 중 맏딸이 낙랑공주이다.
이 낙랑공주는 936년 1000년 사직의 신라를 고려 왕건에게 바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와 결혼한다.

낙랑공주는 경순왕의 우울함을 위로하고자 수도 송악(개성)에서 20여리 떨어진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지었는데,
경순왕 김부는 아침저녁으로 이 산의 산마루에 올라 옛 신라 도읍지 서라벌을 사모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이 도라산(都羅山)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2000년 9월 시작한 경의선 남북 철도 연결공사로
2001년 10월 임진강역 개통에 이어
2002년 2월 12일 설날부터 철도운행이 중단 된지 52년 만에 임진강을 통과하는 도라산역까지 운행되고 있다.
도라산역은 서울에서는 56㎞, 평양으로부터는 205㎞이다.


위 두 낙랑공주의 시간적 차이는 약 900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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