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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부상리 남근석·여근석
충복 영동군 부상골에는 효자로 소문났던 민대혁(閔大爀)의 정려비가 세워져 눈길을 끈다.
흥미로운 것은 화려한 비각과는 대비되는 초라한 돌탑과 선돌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민대혁의 효자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 말기였다.
민씨 집안은 당시 명성황후의 당질이었던 민병주에 의해 이곳에서 토호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는 농민들에 의한 민란이 자주 일어날 정도로 국정이 문란했던 때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효자비를 세운 것은 민중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효자비 옆에 세워진 돌탑이나 선돌이 민중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부상골에게 탑이나 선돌에 대한 제의는 단절된 상태다.
부상골에서 조금 지나면 큰골이 나타난다.
그런데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거대한 ‘부상리 마을자랑비’가 세워져 있다.
무려 5m나 됨직한 거대한 ‘마을자랑비’ 옆에 서 있는 남근석과 여근석은 초라하게 보인다.
마치 효자비와 비각에 가려진 돌탑과 선돌과 같은 처지라고 할 만하다.
자랑비 옆에는 마을의 유래를 설명한 비문도 같이 세워 놓았다.
그 글 중에서 자웅석(雌雄石)과 관계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740년경에 남석(男石)만이 서 있었는데, 가뭄이 극심했던 1940년쯤에 어느 노승이 지나가다가 여석(女石)이 울고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정들을 동원해서 여석을 가져다가 마주보게 하니 마을에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 정월 대보름마다 제의를 올린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도 남근석은 수탑이나 남석, 여근석은 암탑이나 여석이라고 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명칭이다.
부상골 남근석은 3m 가까운 높이로 강함을 상징한다.
부상골 여근석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얼핏 임신한 여성으로 보인다.
그 형상은 영낙없이 남성기를 닮아 있다.
남근석의 크기는 약 266㎝인데, 밑에서터 위로 170㎝ 지점에서부터 좌우로 귀두를 표시하듯이 약 2∼3㎝ 정도의 폭으로 도드라져 있다.
여근석은 한쪽에서 보면 마치 남근석과 유사하지만, 정면에서는 직사각형으로 보인다.
이를 임신한 여성으로 보고 있는데, 약간 과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크기는 최고 높이가 203㎝에 가로가 140㎝ 정도다.
사실 이 남근석도 현재의 위치에 있지 않고 도로보다 동쪽의 옛날 도로에 있었다고 한다.
즉 보은으로 통하는 도로에 ‘말차쟁이’라는 주막이 있었는데, 그곳에 수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로가 폐쇄되고 밭이 되어 탑도 눕혀지면서 마을에 줄초상이 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그래서 수톨을 세우고 마을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와 동제를 중단했다.
추측컨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미신 타파의 일환으로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영동군지’에는 이 제사터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돼 있다.
제사터에 어떤 사람이 집을 짓고, 돌탑이 있던 장소에는 샘을 팠다는 것이다.
그런데 샘을 팔 때 참여한 사람이나 그들의 부인이 계속 죽어 나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 뒤에 이 집을 보건소로 이용했는데, 까치가 유리창에 부딪쳐서 스스로 죽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집은 흉가로 변했다.
흉흉한 사건이 발생하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다시 동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지금 모시고 있는 자웅석, 즉 남근석과 여근석이 그 대상이었다.
지금도 정월 보름날에 맞춰 동계에서 유사 2명을 정한다. 1명은 반장이며, 다른 한 명은 탑제만을 지내도록 한다.
특히 탑제를 담당한 유사는 몸을 정갈히 하는 등 정성을 드려야만 한다.
만약 동네에 불상사가 일어나면 이 유사의 정성이 부족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이 유사를 맡지 않으려고 하기에 순번제로 정했다.
즉 떠맡아서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제사는 남근석에서만 하는데, 이를 위해 2∼3일 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제물로는 백설기와 삼실과, 메, 명태포, 술 등이다. 음력으로 정월 14일 밤 12시쯤에 제물을 차리고 유교식 제의로 행한다.
이 마을에서 전해지는 남근석과 관련한 이야기는 당(堂)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남근석을 단순한 돌이 아니라, 마을을 수호하는 신통력을 지닌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선돌이 지니고 있는 탁월한 생산 기능을 믿어온 우리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근거한다.
그것은 비단 아기를 점지해주는 능력뿐 아니라 곡식의 풍요로운 수확에도 영향력을 준다는 믿음인 것이다.
이런 사정은 비단 부상리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남근석의 명칭 때문인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라도 남근석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감을 없애고 문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김종대·문학박사·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2004.07.06 (화) 세계일보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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