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제천의 공알바위와 선돌 본문
제천은 물론 의림지로도 유명하지만, 송학면 무도리의 공알바위는 그에 못지않게 유명하다.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알바위’로 약 150×100㎝의 크기의 알과 같은 바위가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바위 앞에는 도로가 오래 전부터 나 있었고 철도가 바로 옆에 위치하여 시끄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바위의 안쪽을 유심히 쳐다보니 자갈들이 쌓여 있었다.
이것은 아들을 낳고 싶은 부녀자들이 넣어 놓은 흔적이다.
즉 개울 건너편에서 자갈 3개를 던져 한 개라도 이 바위 안쪽에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리가 족히 20m나 떨어져 있어 바위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도의 수련이 요구될 만하다.
바위 안쪽으로 들어갈 만한 크기도 20㎝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넓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 안쪽에 자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많은 여자들이 찾아와 아들 낳기를 간절히 기원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바위에 대한 제의로 동제가 있다.
음력으로 정월 초이튿날 자정에 포와 삼실과 등의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올린다.
이것은 원래 마을 전체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알바위’는 개인의 치성 대상이면서 동시에 마을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수확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공알바위’는 말 그대로 여성기를 상징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함부로 건드리면 부녀자들이 바람이 나서 마을이 망한다고 한다.
그런 속설 때문에 바위를 시멘트로 메워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국 여러 지역에서 전해진다.
문제는 이 마을에서 이 바위를 용왕바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공알바위’라는 명칭이 상스럽다고 해서 만들어졌다 한다.
하지만 바위 앞의 안내에는 용암이라고 표기돼 있다.
표지판에는 “왕박산(王朴山)의 남맥인 마을 앞 안산(案山)이 마치 용의 형국을 이루었으므로 이 바위를 용암이라고 하고 일명 독바위라고도 일러왔다”고 적혀 있다.
참 혼란스러울 만큼 여러 명칭이 만들어졌다.
<마을제의 때 쳐놓은 금줄로 둘러싸인 송학면 무도리의 공알바위. 안쪽에 자갈들이 쌓여 있다.>
무도리를 떠나 38번 국도를 타고 평야 지대를 따라서 약 6Km 정도 내려가면 입석리에 도착한다.
여기에는 거대한 선돌이 세워져 있다.
일반적인 선돌의 규모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특히 하나의 돌이 아니라, 7개의 돌을 3단으로 쌓아 전체 높이가 약 4m 정도에 달한다. 둘레만도 세 사람이 팔을 펼칠 정도로 약 250㎝라고 한다.
선돌은 마을 입구에 세워져 논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원래는 논 복판에 있었는데, 1992년 농지개량을 하면서 50평에 입석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들의 형상을 보면 단순한 돌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마을의 명칭이 입석리(立石里)인 것도 바로 이 선돌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돌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마고할미가 치마에 돌을 담아와 포개 놓았다고 하는 것이다.
왜 마고할미가 바위들을 이처럼 포개놓았는지 전혀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이들 사이로 천을 넣고 잡아 당겨도 쉽게 끌려 나올 정도로 중간에 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원래 선돌과 관련한 제의가 없었으나, 1974년부터 선돌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마을 노인회가 중심이 되어 축관과 헌관을 뽑아 음력 10월 초에 택일을 해서 제사를 올린다.
이 외에도 몸이 안 좋은 사람이 선돌에 제물을 차리고 비손을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자식이 없는 사람이 몰래 찾아와 이곳에서 비손하기도 한다. 현재도 선돌제 때 쳐놓은 금줄이 남아 있다.
입석리의 선돌은 그 거대함 때문에 생산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돌이 농경지의 한가운데 위치했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돌이 지닌 생산력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송학면 입석리의 선돌. 7개의 돌을 3단으로 쌓아 높이가 약4m에 달한다.>
그렇기에 제천 ‘공알바위’와 선돌은 생산을 중시하는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우리 성문화의 상징으로 보여주는 데 매우 유효한 유물이다.
그러나 현재 이들에 대한 믿음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단지 누가 건드려 훼손할까봐 철책을 쳐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김종대·문학박사·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2004.06.22 (화)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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