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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흔적

충북 괴산의 은티마을

엠알페이지 2008. 4. 1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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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군 연풍면에는 은티마을이 있다.

은티 마을 입구 커다란 화강암 판석에 마을의 유래가 적혀있다.

사실 은티 마을은 여느 산골 마을처럼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그래서 그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다.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근곡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나타난다.

신라 선덕여왕은 세 가지의 일을 미리 알아냈는데, 그 중 하나가 여근곡에 숨어 있던 백제 병사를 찾아낸 일이다.

즉 겨울인데도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울었다고 한다.

이것을 들은 여왕이 군사를 여근곡에 보냈다.

그곳에는 경주를 습격하기 위해 백제 병사들이 숨어 있다가 전멸됐다.

게다가 이들의 후미에 있던 병사까지 몰살됐다고 한다.

개구리가 우는 것은 남자가 성냄을 뜻하는 것이요, 옥문은 여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근곡에 병사가 숨어 있음을 알아내고 이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선덕여왕은 ‘남자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로 들어가면 필경 죽는다(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라고 하는 설명으로 대신했다 한다.

이 마을도 역시 여근곡이기 때문에 이를 맞춰줄 어떤 장치가 필요했던 듯하다.

마을이 번창하고 아들을 많이 낳기 위해서는 남근석을 세워야 한다는 논리가 가미되었다.

여근과 남근을 합체시킴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꾀할 수 있는 인식 때문이다.

물론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한 것은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반대로 여근곡만 있을 경우 마을이 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여자들의 바람기를 잠재울 수 있는 풍수 비보(裨補)의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다.

즉 남근석을 마을 입구, 즉 여성기의 입구에 세움으로써 그 바람기를 막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비단 남근석보다는 탑이라는 장치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마을이 배의 형국일 경우가 그러하다.

과거에 배라는 것은 돛이 달렸기 때문에 바람을 이용해서 항해한다.

그렇기에 바람이 불면 마을이 쉽게 흔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돌탑을 세웠던 것이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도마리 탑동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하지만 은티 마을은 남근석이라는 특수한 사례를 제시했는데, 이것은 마을의 형국이 여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남근석은 하나의 선돌을 세운 것이 아니다.

약 120㎝짜리 남근석을 가운데 세우고 그 옆으로 조그만 돌들을 세워서 아기자기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지난 마을 제의 때 쳐놓은 금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주위에는 아름드리 전나무가 세워져 있는데 300∼400년 정도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남근석에 대한 제의가 매년 섣달 20일에 행해지며, 이를 ‘동구제(洞口祭)’라고 부른다.

아마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붙인 명칭인 듯하다.

음식을 장만하는 주판집과 지관, 축관 등 4명을 선출해서 제사를 올린다.

대개 농사가 잘되고 동네가 화목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현재 거주하는 28가구의 대주(大主·바깥주인)를 위한 소지를 올려주는 것으로 끝난다.


<은티마을 남근석. 지난 마을 제의 때 쳐놓은 금줄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문제는 이 마을의 남근석은 기자신앙의 대상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마을을 수호하는 신앙체로 자리잡았는데, 이것은 남근석이 자식 점지라는 기자신앙의 한 모습으로만 정착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남근석을 모시는 신앙의 중심은 바로 마을의 평안과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것임을 은티 마을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김종대·문학박사·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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