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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마로니에공원 중앙에 서 있는 은행나무(마로니에공원은 이 은행나무가 상징처럼 되었답니다.)아침햇살 받으며 모이를 찾고있는 비둘기들(유난히 비둘기들 많아요.)공원에 널부러져있는 은행나뭇잎(미화원 아저씨가 아직 출근전인가봐요.)공원 내에 있는 서울대학교유적기념비(참고로 이 자리에 1975년까지 서울대학교 본부와 문리대가 있었습니다.)공원 한켠에 서있는 김상옥 열사의 상(1923년 일제치하헤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쫓기다가 이곳에서 경찰과 3시간여의 총격전 끝에 서거하였습니다.)공원 내에 설치된 상설 야외무대.(모 기업의 후원으로 설치되었나봅니다.)이른 아침의 대학로 거리(마로니에 공원의 바로 맞은편에 혜화역 3번출구가 보이네요. 2번출구 앞에서 컷)■지난 주말 아침 8시 경에 찍은 풍경입니다. 우리집..
도봉산역 방면에서 자운봉(도봉산 주봉) 올라가는 등산로 변에 위치한 인절미 바위 ■위 그림의왼쪽 상단 안내판에 씌여있는글은 아래와 같습니다.탐방객들에게 ‘인절미 바위’라 불리는 이 바위는 화강암의 일종으로 박리작용에 의해 풍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박리작용은 암석의 표면이 양파껍질처럼 떨어져 나오는 현상으로 그 원인은 가열과 냉각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암석은 한낮의 햇볕에 의해 가열되고, 밤에는 냉각되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지만, 열전도율이 낮기 때문에 가열의 효과는 암석의 표면에 집중됩니다. 가열로 인해 팽창하는 표면층은 일정 한계를 넘으면 압력에 의해 표면이 벗겨지는데 이것이 박리현상입니다.인절미 바위가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서서히 박리작용이 일어나도록 불편하시더라도 탐방로를 따라 우회하여 ..
■ 점심(點心) 옛날에는 동양이건 서양이건 하루 식사는 두 끼가 기본이었답니다.지금도 히말라야산맥의 고지대에선 하루 두끼의 밥을 먹는다는군요.그런데 하루 세 끼 식사가 기본이 된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아침을 먹기 시작하면서 부터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점심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랍니다.점심이란 불교에서 스님들이 지금의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정신이 흩어졌을 때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간단히 먹는 음식을 이르는 말이랍니다.글자 그대로 마음을 점검한다는 뜻이 되겠네요.(點心)1800년대초 순조 때 실학자 이규경은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은 점심을 먹기 시작하는 날이고,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는 추분에는 점심을 안 먹기 시작하는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문헌이 있음을 참고로 말해둡니다..
탕평채 - 드셔보신 분 있으신가요? ■ 탕평채(蕩平菜) 봄이 되어 먹는 계절음식에 탕평채라는 것이 있다. 이는 녹두묵에 고기볶음, 미나리, 김, 지단등을 섞어 만든 묵무침을 말한다고 한다.당시 봄철의 입맛을 돋구어 주는 음식으로 진달래화전, 진달래화채, 향애단(쑥경단)과 함께 삼짇날의 절식이었다고 한다.영조 때 여러 붕당(당파)끼리 서로 잘 협력하자는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의 음식상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던 음식으로 탕평책(蕩平策)에서 유래되어 탕평채(蕩平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탕평책(蕩平策)은 붕당(당파)의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자(蕩蕩平平)는 것으로 영조, 정조때 정책으로 실시된 바 있다.붕당은 벼슬을 얻기 위해 고향과 스승 등을 끈으로 하여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며(..
덕대제 (德大制)광산 주인과 계약을 맺고 그 광산의 일부를 채광하는 덕대가 물주(物主)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노동자를 고용·관리하여 생산활동을 하던 광산 경영방식. 조선 후기 이후 사금광산에 적용된 덕대에 의한 광산 경영형태이다. 18세기의 사회적·경제적 변화에 따른 상업자본의 축적과 이농민의 증가는 민간자본의 광산투자를 유발하고 광산노동자를 확산시켰다. 민간자본에 의한 광산경영을 규제해왔던 정부는 결국 1775년(영조 51)에 은광의 민영을 허가했다. 그결과 1780년(정조 4)에는 동광(銅鑛)에, 1806년(순조 6)에는 사금광(砂金鑛)에 민간자본 곧 물주(物主)의 자본으로 광산개발이 이루어졌다. 덕대제는이 사금광의 민영이 허가된 이후에 발생한 제도였다. 한편 사금광업의 성장과 덕대제 경영이 확대됨에 ..
대흥(大興)발해시대 제3대 문왕(文王) 의 재위기간인 737년에서 793년까지사용했던 연호(年號). 794년에는 성왕(成王)에 의해 중흥(中興)으로 개원(改元)되었다. 한편 지린성[吉林省] 둔화[敦化]에 있는 육정산고분(六頂山古墳)에서 발견된 정혜공주묘지(貞惠公主墓誌)에 의하면 문왕이 잠시 보력(寶歷)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어서 문왕 때의 연호사용에 관하여서는 약간의 의문이 남아있다.해시대의 연호. 제3대 문왕의 재위 기간인 737∼793년간 사용하였다. 그런데 문왕 때의 연호 사용에 관하여는 약간의 의문이 남아 있다.그러나 문왕 말기 다시 대흥의 연호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어, 이 시기에도 일세일원의 원칙은 그대로 지켜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협회(大韓協會)1907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정치단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일제 통감부에 의하여 강제해산된 뒤 대한자강회의 고문이던 오가키(大垣丈夫)가 이토(伊藤博文)의 내락을 얻어 1907년 11월 10일 윤효정(尹孝定)·장지연(張志淵) 등 이전의 대한자강회 간부들과 천도교의 대표로서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추가시켜 10명으로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대한자강회의 강력한 항일운동을 이어받고 민족진영을 대표하기 위하여 조직한 정치단체로서의 대한협회는 이용구(李容九)에게 이용당하여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제휴하였다.일반회원들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1909년 9월 두 단체는 서로 협력하여 친일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두 단체는 이해관계로 완전히 연합하지는 못하였는데, 이는 일본인 ..
대한제국(大韓帝國)1897년 10월 13일부터 1910년 8월 22일까지 존속한 조선왕조의 국가. 즉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뀐 것이다.조선 말기 극심한 청·일·러의 내정간섭에 대항하여 조선정부는 1897년(광무 1) 완전한 자주독립국을 자처하면서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1907년 이후 隆熙), 임금 칭호를 황제로 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일본 등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계속되는 국력의 약화로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에 병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