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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신단수(神壇樹)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신성한 나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그 기록이 나타나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환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정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왕운기≫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3,000의 무리가 3,000의 귀신으로, 단(壇)이 단(檀)으로 다르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커다란 차이는 두 기록에서 나타나는 신단수에 관한 관념의 차이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언제나 단수 아래에서 웅녀가 빌어 아기 가지기를 원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반면에 ≪제왕운기≫에서는 “웅이 그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셔 사람의 몸을 가지게 한 뒤 단수신과 혼인하여 생남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신단수가 영험이 있는 기원의..
헌책방 지난 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은 물론 중·고교 앞 곳곳에는 헌책방이 곧잘 눈에 띄었다. 특히 신학기를 앞둔 시기에는 많은 학생들이 헌책방을 찾곤하였다. 그러나 경제발전에 따른 결과로 헌책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있다. 요즘은 고서적 등 일부를 제외하면 책을 구입하기 위해 헌책방을 찾는 발길이 거의 없는 실정이라한다. 지금도 청계천 6가에 가면 헌책방들이 옛날같지는 않지만 꽤 있다. 청계천 6가에 있는 헌책방(일요일이어서인지 문 닫은 책방도 많았다.)
바보온달과평강공주 고구려평강왕(平岡王,平原王)때에이름을온달이라고하는마음이착한사람이있었다.그는용모는괴상했나속마음은밝아홀어머니를걸식으로봉양하며살고있었다. 그때평강왕의딸로서평강공주가있었는데어려서몹시울어,부왕이자꾸울면온달에게시집보내겠다는농담을하곤하였다.시집갈나이28세가되어부왕이귀족인상부고씨집에시집보내려하자공주는부왕의평소말대로온달에게가겠노라고우겼다.부왕은노하여공주를궁궐에서내쫓자공주는그길로온달을찾아가결혼을했다. 공주는자기가궁궐에서나올때가지고온패물로의식을해결하고,왕실의병약한말을사오게하여잘먹이고온달에게무예와학문을닦게하였다. 고구려는매년봄3월3일에낙랑의언덕에서수렵대회를열었는데,여기서온달이실력을발휘하여이소식이왕에게까지알려지게되었다.그후중국후주의무제가쳐들어오자온달이선봉이되어무찌르니,사위로인정받아그에게대형(大兄)의벼슬이내려진..
호동왕자(好童王子) 호동(好童)은유리왕의셋째아들인대무신왕의차비(次妃)에게서난소생이다. 왕은그를심히사랑하여호동(好童)이라이름하였다.대무신왕15년4월에왕자호동이옥저(沃沮)를유람하였는데,낙랑의왕최리(崔理)가여기나왔다가호동을보고"그대의얼굴을보니보통사람이아니로다. 그대야말로북국(北國)신왕(神王)의아들이아니겠는가?"하며호동을데리고돌아가사위를삼았다. 그뒤,호동이고구려에돌아와낙랑(樂浪)에있는아내최씨녀(崔氏女)에게사람을보내어전하기를"그대의나라무구(武庫)에들어가고각(鼓角-북과나팔)을몰래찢어버린다면내가그대를아내로서맞아들이려니와그렇지못하면우리는부부가될수없으리라."하였다. 그이유는낙랑에는옛날부터신기한고각이있어적이침입하면스스로울리는지라,그로써침략할수가없기때문에그랬던것이다. 과연최리의딸(낙랑공주)은몰래무고에들어가예리한칼로그고각을찢..
설씨녀와 가실설씨녀(薛氏女)는신라율리민가의여자다.비록외롭고한미한집안에서태어났으나,안색이단정하고지행이순결하여본사람치고부러워하지않는자가없었으나감히범하지못하였다. 진평왕때그아버지가늙은나이로서군에편입되어정곡이란곳에수자리살러가게되자,그녀는늙고병든그아버지를차마멀리이별할수도없고,또여자의신분이라모시고따라갈수도없어그저답답히여기기만하였다. 사량부(沙梁部)에사는소년가실(嘉實)은비록가난한집안이지만,교양이있는바곧은사나이다. 일찍이설씨를좋아하고있으나감히말은못하더니설씨가자기어른이종군하는것을근심한다는말을듣고드디어찾아가설씨에게청하기를"내가비록용렬하지만항상의기있는사람이라자처해왔다. 못난이몸으로귀댁아버님의출역을대신하고싶다."라고하므로설씨는대단히기뻐하며들어가아버지께아뢰었다.아버지는들어오라고하여보고말하기를"듣건대그대가노인의역사를대행한다하니기..
1. 아리따운 여인원효가 소요산 암자에서 혼자 수도할 때의 일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낯선 젊은 여자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갈 것을 청했다. 원효는 비내리는 밤이므로 그 여인을 되돌려보낼 수가 없어 하룻밤 묵어 가도록 허락했다. 침침한 등불에 비친 그 여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도승인 원효는 괜히 여자를 맞아들였다고 뉘우쳤지만 이미 허락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이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원효는 정진(精進)을 할 수 없었다. 원효는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법이다. 내가 色心이 없다면 이 여인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나의 오랜 수도(修道)를 이 여인으로 인하여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없다." 고 되뇌면서 비에 젖은 여인을 따뜻한 곳으로 눕히고 손으로 차가운..
쉽고 흔하게 쓰면서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역사상 낙랑공주는여러 명이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공부하면서 흔히 들었던 낙랑공주 두 명을 알아보기로 하지요. [1] 하나의 낙랑공주 (樂浪公主) 하나는 낙랑국의 왕인 최리의 딸로 이는 호동왕자와의 비련으로 잘 알려져 있는 낙랑공주이다. 널리 쉽게 알려져 있는 이야기지만 여기서 다시금 정리해 보기로 한다. 호동(好童)은 고구려 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에게서 태어난 소생이다. 호동왕자는 서기 32년 4월 옥저로 놀이를 나갔다가 낙랑국의 왕 최리(崔理)를 만난다. 낙랑국의 왕 최리는 호동의 기개와 용모에 반하여 호동을 데리고 낙랑국으로 간다. 최리왕은 호동에게 낙랑공주를 보여주었다. 호동도 낙랑공주..
아사달과 아사녀백제의 유명한 석공인 아사달에게는 아리땁고 어여쁜 아사달이라는 아내가 있었다. 신라에서 불국사 내에 석가탑을 짓고 있을 때 아사달은 김대성의 초청을 받아 신라로 갔다. 아사달이 탑을 세우는 일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한 해 두 해가 흘렀다. 한편 남편과 만날 날만을 고대하며 그리움을 달래던 아사녀는 기다리다 못해 천리길을 마다않고 신라 불국사를 찾아왔다. 하지만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여보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사녀는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날마다 불국사 문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에서나마 남편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주지스님이 아사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