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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흔적

정명공주

엠알페이지 2023. 1. 2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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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의인왕후 사망 후 3년 뒤인 1602년 이조좌랑 김제남의 딸을 간택하여 계비로 맞아들이게 되는 데 이때 선주의 나이가 51세였고, 인목왕후의 나이는 불과 19살이었다. 사실 선조의 경우 자신이 정실 소생이 아니었던지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묵왕후를 통해 꼭 정실 소생의 후손을 낳아 자신의 뒤를 잇게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목왕후는 1603년에 정명공주를 낳고, 다시 3년 후에는 영창대군을 낳는다. 이미 전란중에 세자로 정해졌던 광해군과 그 무리들은 이를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이때부터 조정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뉘어져 싸웠는데 영창대군을 유독 이뻐하던 선조는 소북의 유영경을 영의정으로 올려 세우면서 영창대군은 선조의 뒤를 이을 세자로 낙점 받는듯 보였다. 그러나 정명공주가 6살, 영창대군이 2살이던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어쩔수 없이 선조는 광해군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이제 인목왕후, 정명공주, 영창대군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해졌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소북의 중심 유영경을 처형하고 수많은 소북인사들을 몰아낸다. 또한 그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에게 그 칼날을 돌리기 시작하는데 1613년 결국 일은 터지고 만다.

그 일은 한양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던 문경새배에서 일어나는데 이곳을 지나던 상인을 도적이 죽이고 수백냥을 탈취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 주모자가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던 박순의 서자 박응서였고, 그와 함께한 동료들 역시 서얼이 대다수로 밝혀지면서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박응서 일당에게 문책이 이어지자 박응서가 문책 도중 자금을 확보해 인묵왕후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도와 광해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옹립하였다는 진술을 한 것이다. 이것은 박응서가 영창대군을 피예로 죄를 면해보겠다는 술수였지만 광해군은 알면서도 그 화살을 김제남과 영창대군에게 돌려버린다. 이에 김제남은 처형되과, 7살의 영창대군은 강롸도로 유배되어 죽는 이른바 계축옥사가 일어난다. 그러자 인목왕후 역시 광해군의 명령으로 서궁에 유폐되고, 정명공주 역시 함께 평민신분으로 서궁에 감금된다.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을 dfg은 인묵왕후가 지탱할 것은 이제 오직 정명공주 밖에 남지 않았고 공주를 지키고자 광해군이 정명공주의 일을 물으면 죽었다고 할 정도로 정명공주를 지키려 노력했다고 한다. 이때 정명공주는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붓글씨를 쓰곤했는데 선조와 인묵대비가 명필이었던지리 정명공주 역시 그 글씨체를 따라하며 후에 명필로 이름을 날리는 기본을 닦는다.

그렇게 쥐죽은듯이 인목왕후와 정명공주가 살아간지 10년이 지났을까? 1623년 마침내 조정에서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무너지게 되고, 정명공주와 인목대비는 마침내 밖으로 숨을 쉬며 궁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궁으로 돌아오자 시급한 것이 정명공주의 혼인 문제였다. 그때 정명공주의 나이가 21세였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명공주는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을 부마로 맞게 된다. 그런데 이때 인목대비는 왕만이 탈 수 있는 어승마를 부마였던 홍주원에게 내주면서 조정의 공분을 사는 일이 발생하는데 인주 역시 이를 탐탁치않게 여겼으나 반정의 명분으로 인해 그냥 넘어가는 해프닝도 발생하낟. 여하튼 인조는 정명공주에게 기와집은 물론 경상도에 엄청난 땅을 내리는 등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조의 배려에도 정명공주는 인조의 의심을 받을만한 행동을 하지 않기위해 집에서 글씨를 쓰거나 바느질을 하며 보냈다고 하며, 특히 한석봉체를 잘써서 조선 후기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남구만은 정명공주의 글씨를 칭찬한다고 전해진다.
 
정명공주는 1637년 인조가 굴욕을 당한 병자호란때 강화도로 피난을 떠나 적성사에 피신해 있었는데 피난 당시 공주의 금은보화를 배에 실으려다가 백성들을 태우지 못하게 되자 재물을 모두 버리게 하고 백성들을 먼저 태우게하라는 씀씀이도 보였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정명공주의 마음씨에 탄복하며 그 후손들이 번창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축복때문이었을까? 실제로 공주는 슬하에 7남 1녀를 두며 번성했는데 그 후손 역시 대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공주의 장자 홍만용은 숙종조에 이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했고, 홍국영, 홍봉한 그의 딸 혜경궁홍씨는 물론 임껒엉을 쓴 벽초 홍명희 역시 정명공주의 자손이다.

또한 정명공주 그 자신도 인조는 물론 효종, 헌종, 숙종까지 3대동안 취고의 어른으로 장수하였고, 1685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는데 이는 조선시대 공주 가운데 가장 장수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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