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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고조선시대에 8개 조항으로 된 법으로 8조금법(八條禁法), 8조법금(八條法禁)이라고도 불리운다. 중국 후한(後漢)의 역사가 반고(班固, 32~92)가 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수록되어 있다. 중국의 〈사기〉와 〈한서〉에는 기자(箕子)가 8조(條)에 해당하는 법률을 제정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기자팔조교라고도 한다. 당시의 법률은 대개 형법(刑法)으로 응보주의(應報主義)에 의거해 만들었기 때문에 단순하고 엄격한 데 그 특징이 있었으며,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률로 만족했다. 모든 것을 선(善)과 악(惡)으로 구별했는데, 이는 신(神)의 뜻에 따라 정해지는 것으로 여겨 종교적 제사를 지낼 때 죄를 처벌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록에는 없고, 8개의 조문 중 아래의 3개 조문만이반고의 한서..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북방식)은 만주와 북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어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짐작하게 해 준다.
빙하기 한반도 주변 지형도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해발 200m가 넘는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빙하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한반도가 빙하의 주변지역이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빙하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낮아져서 중국 대륙, 한반도, 일본 열도, 대만 등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의 동해도 당시에는 호수였다. 간빙기에는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해안선에 큰 변동이 있었다. 이처럼 자연 환경이 변함에 따라 동식물의 생장에도 크게 변화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도 먹이를 찾아 광범한 이동 생활을 해야만 했다. 구석기 시대에는 4번의 빙하기와 3번의 간빙기가 있었다.
목지국(目支國) 삼한(三韓)은 여러 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마한에 54개,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에는 각각 12개의 소국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는 더 많은 소국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소국들은 자치독립적인 정치집단이었지만, 마한, 진한, 변한 중 한 곳에 소속되어 상당히 느슨한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소국들 중의 하나인 목지국(目支國)은 마한 소속의 소국 중 맹주국의 위치에 있었던 나라이다.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어 오고 있으나, 천안 일대에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3세기 중반 이후 백제가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고대 국가로 성장하면서 목지국은 마한 맹주국의 지위를 상실해 갔고, 이후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진(辰)[또는 진국(辰國)]은 한반도 중남부 삼한(三韓 : 부족연맹체 단계)이 생기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부족연맹체이다. 중국에는 전국시대가 끝나고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하여 진(秦)을 건국(BC221)을 건설하고, 이어 진한교체기(BC206~BC202)을 거쳐 유방이 한(漢)을 건국하는 격동기가 있었다. 이 진말(秦末)ㆍ한초(漢初)의 격동기에 중국으로부터 많은 유이민(流移民)들이 동방으로 피난하여 왔다. 전국시대의 연(燕)ㆍ제(齊)ㆍ조(趙) 출신의 사람들은 고조선지역으로, 진(秦) 출신의 사람들은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이주해왔다. 위만도 이때 고조선 지역으로 넘어온 유이민이었으나, 나중에 준왕을 쫓아내고 왕이 된다. 이 중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한강 이남 지역에는 원시사회가 무너지고..
제정일치(祭政一致) 제사와 정치가 일치한다는 사상 또는 정치체제이다. 즉, 신(神)을 대변하는 제사장(祭司長)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 또는 정치체제이다. 종교와 정치권력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체제이다. 한국의 경우는 부여.고구려의 제천의식에서 제정일치의 사회형태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제정의 분리가 이루 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시기는 별읍이나 종교전문가인 천군이 등장하는 삼한사회부터라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세속적인 권력의 대표자인 군장과 직업적인 종교전문가인 천군이 별도로 존재하였다(제정분리). 제정분리는 고대국가 출현 이전의 군장 또는 족장사회단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시대의 왕. 위만(衛滿)의 손자로 고조선시대의 마지막 왕이다. 위만이 즉위한 뒤, 고조선은 우세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지역을 정복하면서 세력이 더욱 강대해졌다. 우거왕은 이것을 배경으로 중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 있는 진국(辰國) 등 여러 나라가 한(漢)나라와 직접 교통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당시 몽고에서 만주로 뻗어오던 흉노가 고조선과 연결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한나라 정부를 더욱 자극시켜 고조선과 한나라는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 대립관계를 해소하려는 정치적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무제(漢武帝)는 서기전 109년 마침내 무력으로 침략해왔다. 고조선은 이에 대항해 1년을 잘 싸웠으나 마침내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이 적군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