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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거석문화(巨石文化 megalithic culture ) 고인돌과 선돌 등의 거석기념물이 제작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의 문화. 고인돌과 선돌(입석)은 거석을 이용한 구조물로, 거석 문화의 상징이다. 크게 보았을 때 이집트나 마야의 피라미드, 중동 지방의 각종 석조물, 프랑스 서북부 대서양 연안 지역의 거석렬(巨石列)과 영국의 스톤헨지 등이 모두 이 거석 문화의 산물이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데, 형태에 따라 북방식(탁자식), 남방식(바둑판식), 개석식으로 구분한다. 유네스코 세계 위원회는 2000년 12월에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지를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거문도(巨文島)사건 1885년(고종 22년)부터 2 년간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적으로 점령한 사건. 거문도는 전남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조선·일본 간의 해상 통로였으며, 러시아 동양함대의 주항로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해 온 영국은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 한반도 진출을시도하자, 거문도를 점령하여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청(淸)이 개입하여 러시아가 조선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자 1887년(고종 24년) 2월에 거문도에서 영국 군대가 철수하였다. 이 사건은 영·러 간의 문제로 발생하였으나 주권국인 조선의 양해 없이 점령이 이루어졌고, 사건 해결 과정에서 청이 개입하여 열강의 이해 관계에 따라 외교 교섭이 진행되는 등, 조선..
거란(契丹)4세기 이래 내몽고의 시라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10C초 예뤼아바오지가 여러 부족을 통일해 거란 왕국을 세웠다. 태종때 국명을 '요' 라고 고쳤으며, 그후 차차 강성해져서 송과 대적할수 있을정도로 강해 졌으나, 1125년 '금'에의해 멸망당하였다.거란장(契丹場)고려시대 거란 유민(契丹遺民)들이 고려에 와서 함께 모여 살았던 곳. 고려는 993년(성종 12) 거란의 침입을 시작으로 1125년(인종 3) 거란인이 세운 요(遼)가 멸망한 후까지 거란과 자주 충돌하였다. 이 때부터 고려에는 거란군 포로나 투항해 온 자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특히 1216년(고종 3) 걸노(乞奴)가 이끄는 9만의 거란유민군이 고려를 침범한 이후 거란의 항쟁은 극에 이르렀으나, 1219년 장군 김취려(金就礪) ·조충..
선돌은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처럼 선사시대의 유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선돌은 의미 있는 대상이었다. 무엇보다도 왕성한 생산력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돌은 마을 공동체 신앙의 중요한 신체(神體)로서 역할을 했다.충북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에는 3기의 선돌이 있는데, 이 중마을 입구의 우측 언덕에 위치한 여근석 선돌은 마치 배가 부른 임신부의 모습을 띠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치 사람의 배에 해당하는 부분에 직경 84㎝의 둥근 원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임신부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왜 돌의 중간부에 원을 형상화했을까. 과연 그것은 단순한 표현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원의 형상은 임신을 뜻하는 것으..
영동 부상리 남근석·여근석 충복 영동군 부상골에는 효자로 소문났던 민대혁(閔大爀)의 정려비가 세워져 눈길을 끈다. 흥미로운 것은 화려한 비각과는 대비되는 초라한 돌탑과 선돌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민대혁의 효자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 말기였다. 민씨 집안은 당시 명성황후의 당질이었던 민병주에 의해 이곳에서 토호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는 농민들에 의한 민란이 자주 일어날 정도로 국정이 문란했던 때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효자비를 세운 것은 민중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효자비 옆에 세워진 돌탑이나 선돌이 민중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부상골에게 탑이나 선돌에 대한 제의는 단절된 상태다. 부상골에서 조금 지나면 큰골이 나타난다. 그런데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거대한 ..
[객주(客主)] 1. 개념상품 집산지에서 상품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주선하던 중간상인. 현재의 상법상 위탁매매인에 해당한다.좁게는 행상, 넓게는 객지에서 장사하는 모든 상인을 뜻하는 객상에 대하여 모든 행위의 주인(주선인)이라는 뜻을 갖는 객상주인(客商主人)이다.상인으로부터 매매의 위탁을 받은 물건을 모아서 모든 상인에게 유통시키는 위치에 있는, 초기의 자본가 계급에 속하는 우리 나라 고유의 좌상(坐商)이다.보부상(褓負商)이 유통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직접 소비자들과 상대하는 우리 나라 고유의 행상인 것과 대조된다. 객주는 중간상인으로서, 직접 자신을 위하여 물건을 매매하는 것이 아니고, 위탁자와 그 상대방의 사이에서 간접매매를 하는 상인인 점에서 우리 나라 고유상인인 거간(居間)과 같다. 객주는..
개화사상(開化思想) :19세기 중엽 이후의 근대 국가·사회 건설을 지향하던 부르주아 개혁사상.개화사상은 19세기 중엽의 민족적 위기를 당해 나라와 백성을 자주적으로 근대화하고 변혁해서 진보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이 시기는 안으로는 봉건사회의 낡은 틀을 부수고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개화사상은 이러한 국내의 봉건적 모순을 자각하고 세계 역사발전의 방향에 따라서 내외정치를 개혁하려던 개혁사상이었다.개화사상의 내용은 당시 조선왕조 사회가 당면했던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고 자주 부강한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해, 나라의 자주독립과 발전을 실현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
개화당(開化黨) : 독립당개화사상의 비조인 오경석, 박규수, 유홍기 등의 영향과 교육을 받고, 1874년경부터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등이 중심이 되어 개화 정책을 추구한 정치집단.1874년(고종11)경부터 김옥균(金玉均)·박영교(朴泳敎)·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중심이 되어 개화 정책을 추구한 정치 집단.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모방해 급진적으로 개화 독립할 것을 주장하던 개화독립당(開化獨立黨)으로 수구당과 대립하였다.이들은 일본의 힘을 빌려 정권을 쟁취하고, 청나라의 간섭에서 탈피해 진보적 내정개혁과 부흥을 꾀하려하였다.수구당(守舊黨) : 사대당조선 말기 조선 정계 내에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청나라에 의존하면서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해갈 것을 주장하던 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