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체 글 (428)
히스토리아
☞인왕산 선바위 선바위 혹은 입석(立石)이라고 부르는 바위는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길쭉하게 서 있는 바위를 선바위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선사시대 이후 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왜 이들 바위가 주목을 받았는가? 무엇보다도 이들 바위는 땅속에 박혀 있다. 그런 형상 자체도 매우 의미심장하지만, 실상은 이런 바위 형태가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기자(祈子)신앙과 같은 민간신앙의 치성 대상으로만 존재해 왔던 것일까? 인왕산에 위치한 선바위는 국사당을 밑에 두고 있다. 원래 이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를 모신 사당으로 남산에 있었던 것인데, 일제 때 남산에 신사를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국사당 위에 있..
민속으로 보는 性(2) 사람의 신체에 달려 있는 과장된 성기가 보다 많은 생산을 초래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우리 조상들은 거대한 바위에 나타난 성기를 숭상했다. 그리고 이들 바위를 신성하게 모시는 민간신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성기바위, 즉 남근석은 그렇다면 어느 때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았을까? 청동기 시대 이래로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정착생활을 하며 농사를 지으면서 추구하였던 가장 큰 지향점은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수확이 요구되었다. 농사가 잘되고 못되고의 사연은 물론 자연재해로부터 얼마나 피해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자연재해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남근석에 대한 치성행위였다. 즉 많은 결실을 위해 생산력이 강한 남근석..
강동6주(江東六州)고려 성종 때 서희(徐熙)와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의 강화회담에 의해 얻은 서북면(西北面)의 6개 주(州).지금의 평안북도 서북 해안지대에 설치하였던 6주즉흥화(興化;義州 동쪽)·용주(龍州;龍川)·통주(通州;宣川)·철주(鐵州;鐵山)·구주(龜州;龜城)·곽주(郭州;郭山)를 말한다. 고려시대 서북면(西北面) 해안지대에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태조때부터 추진해온 북진정책에 큰 장애가 되었다. 그런데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의 제1차 침입 때 서희(徐熙)가 거란의 장군 소손녕(簫遜寧)과 담판함으로써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편입했다. 당시 소손녕은 고려 침입의 이유를 첫째로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자기네의 소유인데 고려가 침식했으며, 둘째로는 자기 나라와 접경하고..
민속으로 보는 성(性)성(性)은 가장 고귀한 것이면서도 오랜 기간 유교 전통에 갇혀 그에 대해 관심을 드러내면 천박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 내려온 설화들과 전국 각지에 널려 있는 남근석, 여근석 등 각종 성 관련 민속자료들은 조상들의 성에 대한 관심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상징물들이다. 전통 생활과 민속에 뿌리내린 성에 대한 올바른 접근 없이는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의 깊이도 얕을 수밖에 없다. 한국문화 유산 가운데 아직 온전하게 설명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다. 그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알리는 작업은 매우 긴요하다. 쉬운 예로 전통적인 성과 관련한 풍속과 이야기가 그러하다. 최근에 와서 이들과 관련한 보고서나 논문, 그리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하지..
강동성의 싸움, 강동(江東)의 역(役) 고려·몽고·동진국의 연합군이 강동성(지금의 평안 남도 강동)에서 거란족을 격퇴한 싸움. 강동(江東)의 역(役)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추격을 피해 고려로 피신해 온 거란족이 강동성에 머물자 몽고와 동진국의 연합군이 이들을 추격해 왔고, 이에 고려는 불가피하게 공동 작전에 임하여 마침내 고종 6년(1219)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이 때 고려와 몽고군 사이에는 형제의 맹약이 체결되었고, 이후 고려는 맹약의 조건에 따라 몽고에 세공(歲貢)을 바쳐야 했다. 고려의 북쪽 축성이 청천강,박강 유역에 집중된 것은 북방민족으로부터 국경선을 수호하려는 고려인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였다. 강동 6주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주요격전지로 거란군을 잘 막아낸 곳이다. 군사·교통상 요..
아주 옛날옛적 '거울'이라는 개념조차도 잘 알려지지않았던 때의 일이다.산골에 사는 한 여자가 서울에는 둥글기가 보름달 같은 청동거울(그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거울을 한번 보기를 원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남편이 서울에 가게 되었는데 마침 보름 때였으므로 저 달처럼 생긴 물건을 사 오라고 하였다.그런데 남편이 일주일여 동안에 걸쳐 서울에 도착하여 달을 보니 반달이 되었으므로 아내가 원한 것이 빗인 줄 알고 빗을 사 왔다.돌아온 남편에게 아내가 요구한 것이 그것(빗)이 아니라고 하자, 그는 서울의 달과 시골의 달의 다름이 괴이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남편이 다시 서울에 가서 거울을 사 왔다. 부인이 거울을 보자 거울 속에 여자가 있으므로 평소 자기 얼굴을 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무장독립운동단체.1910년대의 비밀 결사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던 단체는 대한광복회였다. 1913년 경북 풍기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김상옥 등이 조직한 비밀 독립운동 단체로 처음의 명친은 대한광복단이었다. 1915년 박상진, 우재룡, 양제만 등이 가담하면서 대한 광복회로 개칭하여 악질 관리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조직은 중앙에 총사령 박상진, 부사령 이석대(뒷날 김좌진), 지휘장에 권영만을 두고, 그 밑에 재무부와 선전부를 갖추었다. 그리고 각 도에는 지부장을 두었고, 만주 지도부도 결성하였다. 광복회는 투쟁 방법으로 ① 일반 부호의 의연금과 압수한 불법 징수 세금으로 무장을준비하고, ② 남북 만주에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