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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교육입국조서1895년 2월2일에 고종이 교칙으로 발표한 교육에 관한 특별조서로서 교육조서라고도 한다. 교육에 의한 입국의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근대식 학제를 성립시킬 수 있는 기점을 마련하였다.
교단조직 신라는 나라에 국통(國統), 주에 주통(州統), 군에 군통(郡統) 등 승관(僧官 - 승려의 관직)을 둠으로써 국가의 주도 하에 교단 조직을 갖추었는데, 이것은 신라의 불교가 국가 불교의 성격을 지녔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교단 조직은 진흥왕 때 고구려로부터 귀화한 승려 혜량(惠亮)을 국통으로 임명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교관겸수(敎觀兼修)고려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주장한 불교의 교리체계인 교(敎)와 실천수행법인 지관(止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사상. 고려 초기에는 태조(太祖)의 후원에 힘입어 선수행(禪修行)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禪宗)이 세력을 떨쳤으나 현종(顯宗) 이후로는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 등 교리의 연구를 우선으로 하는 종파들이 세력을 얻어 선종에 대항하였다. 이들 종파들은 자신들의 우수함만을 강조하며, 서로 배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이때 이러한 종파적인 편견과 대립을 개탄한 의천은 천태와 화엄의 양종을 통한 종합적인 불교관을 세워 교와 관을 함께 닦는 것이 불교수행의 바른 길이라고 하였다. 교만 닦고 선을 없애거나 선만 주장하고 교를 버리는 것은 완전한 불교가 못된다고 결론을 내렸다.이와 같이..
광주학생항일운동(光州學生抗日運動)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투쟁운동. 광주에서 기차통학을 하던 한· 일 학생 사이의 싸움이 도화선이 되어 광주의 2,000여 명의 학생이 궐기하였다. 점차 일반 시민들이 합세하여 광주학생시위의 여파는 마침내 전국으로 번졌다. 3· 1운동 이후의 가장 거센 항일운동으로, 이 운동에 참가한 학교는 194개 교, 참가 학생 수는 5만 4,000여 명이었다. 이 운동은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은 20년대 학생운동의 한 정점이었으며, 일제 강점하 최대 규모의 학생항일운동이었다. 이에 53년부터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해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고 있다.광주민주화운동(光州民主化運動)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
광제원(廣濟院) 광혜원(廣惠院)광제원(廣濟院)조선 말기의 질병치료시설. 1899년(광무 3) 내부(內部)에 예속된 국립병원으로 일반 백성들의 질병을 고치는 일을 맡아보았다. 1907년 광제원의 제도가 폐기됨에 따라 의정부 직할의 대한의원(大韓醫院)으로 이관되었다. 광혜원(廣惠院)1885년(고종22) 미국인 알렌에 의하여 세워진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의학 의료기관. 처음 명칭은 왕립광혜원이었다. 1885년 왕립병원으로 개원하여 진료활동을 한 이래 1894년 6월 갑오경장의 행정관제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을 설치하여 종두 및 의약. 전염병예방업무 등을 맡게 하면서 7월 18일 내무아문으로 폐합되었다.
광작(廣作) 조선 후기 , 이앙법(移秧法)의 보급에 따라 농민들의 경작 능력이 향상되면서 많은 토지를 직접 경영하던 영농 방법. 이앙법은 노동력의 절감을 가져 왔고, 그에 따라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경지 면적은 종래에 비해 4 배로 늘어 났다. 자작농이나 소작농은 소작지의 확대를 통해서 광작 경영을 도모하였으며, 지주들도 소작을 주지 않고 직접 광작 경영을 시도하였다. 이 때 필요한 노동력은 임노동자로 충당하였다. 광작의 유행은 농민의 계층 분화를 초래하였다. 즉, 광작을 통해 경영의 합리화를 이룩한 농민(광작농)은 지주에게 토지를 빌려 경영규모를 늘려가면서 이른바 경영형 부농으로 성장해 간 반면에, 하층 농민은 소작지를 얻기도 어려워져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농촌과 도시의 임금노동자나 노비로 전락..
광업령광인사(廣印社) 1880년대 초 서울에서 설립된 출판사겸 인쇄소. 일명 광인국이라고도 한다.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할 때인 1880년대 초에 서적을 출판하여 이익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여러 명이 합자하여 설립하였다. 출판한 서적으로는 ,안종수의 , 강위의 시문집인 가 있다.
광복군(光復軍)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광복군(光復軍) 한국 광복군의 창설을 시도한 것은 중일전쟁 이전이었으나 본격화 된 것은 중일전쟁 이후였다. 임시정부의 김구,지청천 등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항전하던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의 독립군과 중국 대륙에 산재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던 수많은 청년을 모아 마침내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만주에 있던 무장 독립군. 광복군 사령부가 해산될 때, 그 중의 일부가 군대로 재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광복군 총영은 국내외 각지에서 일제 기관을 습격하여 파괴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1922년 광한단 기타 여러 단체들과 합작하여 통군부가 되면서 광복군 총영은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