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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광무(光武) 대한 제국의 연호. 1897년(고종34)에 제정되었다. 조선 개국 506년 8월 17일부터 광무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순종이 즉위하는 1907년 8월까지 10년간 사용되었다.
광덕(光德)고려시대 949년 광종이 즉위하면서 쓴 연호. 쓰기 시작한 연대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950년을 광종 1년으로 잡고 있고, 해동금석원 海東金石苑에 적혀 있는 광자대사비명(廣慈大師碑銘)에는 광덕 원년이 949년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 : 즉위 다음해를 원년으로 삼는 법)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각종 금석문의 자료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949년을 광종 원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이 연호는960년 준풍(峻豊)으로 바꿀 때까지 썼다.준풍(峻豊)고려 광종 때의 연호. 960년(광종 11)에 광종은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취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개성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 칭하는 한편, 연호도 주체성을 발휘하여 준풍으로 정했다. ..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414년(장수왕 3)에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 사면석비(四面石碑)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동쪽 국강상(國岡上)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 글자를 본떠서 일명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고려시대의 미륵보살입상. 보물 제218호. 높이 18.2m. 화강암으로 만들으며, 968년(고려 광종 19)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관촉사에 있다.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며,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주름선이 간략화되어 단조롭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만든 관음..
관찰사(觀察使) 조선시대 외관직 문관의 종2품 벼슬. 전국 8 도에 파견되었으며, 일명 감사(監司)라고도 하였다. 또 지방의 우두머리라는 뜻에서 방백(方伯)이라고도 하였다. 이들은 병마절도사(兵使)·수군절도사(水使)의 무관직을 겸하기도하였고, 감영 소재지의 부윤(府尹)이나 목사(牧使) 등을 겸함으로써 그 권한은 더욱 확대되어 사실상 행정·사법·군사의 3 권을 장악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안렴사·관찰출척사라 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안렴사·관찰사·관찰출척사 등의 이름으로 자주 바뀌었으며 관찰사로 굳어진 것은 7대 세조 때부터였다. 중요한 정사에 대해서는 중앙의 명령을 따라 시행하였지만, 자기 관하의 도에 대해서 민정·군정·재정·형정 등을 통할하여 지방행정상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관하의 수령을 지휘 감독..
관수관급제관장(官莊)고려·조선시대에 관수품(官需品) 조달을 위하여 관공장(官工匠)을 사역하여 생산활동을 하였던 관영공업.
관산성(管山城)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에 있었던 삼국시대의 성.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신라가 동맹을 깨뜨리고 백제의 영토인 한강유역을 점령하자 554년(신라 진흥왕 15)에 백제는 일본에 원군을 청하는 한편,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그러나 이 싸움에서 백제는 김무력(金武力)·고간(高干) 등이 거느린 신라군에 크게 패하여 성왕은 전사하고 좌평 4인, 군졸 2만9600여인이 전사하였다. 이 곳 싸움으로 나제동맹은 깨어졌고 신라는 한강유역을 점유하여 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관산성의 위치는 백제성왕사절지(百濟聖王死節地)로 전해지고 있는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과 이곳에서 맞은편 서북방으로 약 800m 떨어져 있는 환산성(環山城 :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