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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박정희 정권의 국가주의적·전체주의적 교육 이념을 담은 헌장이다.우리 나라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이념과 근본 목표를 세우고,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을 밝힌 교육지표이다.1968년 12월 5일 공포되었으며 철학자 박종홍(朴鍾鴻) 등이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 '반공'과 '민족 중흥'이라는 집권세력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이상으로 삼고 그 실현을 국민교육의 지표로 삼은 까닭에 국민교육헌장은 선포 당시부터 정치적 논란을 빚었다. 국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1907년 7월 8일에 설치.국무 연구소의 문제 토의 과정에서 위원들이 제출한 연구안 등의 등사물은 고려 대학교 아세아 문제 연구소의 육당문고에 보관. 최종 보고서의 일건서류는 일본 동경대학 중앙도서관의 오구라 문고에 보관.
국무원(國務院)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행정부. 국무원 안에 내무,외무,재무,법무,군무,교무의 6부를 둠. 1927년 헌법개정, 국무령 제도를 없애고 국무회의 제도를 체택. 1940년충칭에 정착. 1955년 2월 의 개정, 국무원 사무국 설치. 1960년 7월 에 따라 국무원 사무처로 승격. 1962년 제5차 개정 헌법에서 국무원이 '국무회의'로 개정.
국권수호운동(國權守護運動) 1905년 체결된 한일협약에 반대하여 일어난 국민적 운동.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호소하였으나 결국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퇴위당하고 정미 7조약이 맺어지면서 일본이 내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의 식민지화를 반대하고 주권 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해 근대문물을 받아들여 실력을 양성하자는 애국계몽운동과 무력으로 일제를 물리치자는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국권회복운동은 관원,양반,상인,농민,천민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의 호응을 얻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점차 실력양성론과 무장투쟁론으로 자리잡아갔다.
구황촬요(救荒撮要) 흉년이 들었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적은 책인데, 명종 때 남부 지방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한글본으로 간행하였다. 영양 실조로 중태에 빠진 사람들의 구급법과 대용 식품을 만드는 방법, 그에 필요한 조미료와 중환자의 소생에 필요한 비상용 술을 담그는 방법 등이 주요 내용이다.
9주5소경(九州五小京) 통일 후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지방 제도의 정비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신문왕 때 9주 5소경제로 완성되었다. 지방 통치 조직의 기본이 된 것은 주,군,현이었다. 통일 전의 5주를 바탕으로 신라,고구려,백제의 옛 땅에 각각 3개 주씩 모두 9주를 설치하였고, 주 밑에 군,현을 두었다.주의 장관은 총관이라 하다가 다시 도독으로 바뀌었는데, 통일 전에 군주(軍主)라고 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지방 장관의 성격이 군사적인 것에서 점차 행정적인 것으로 변화해 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군과 현에는 태수와 현령이 파견되었다. 현 밑에는 일반 양민이 사는 촌과 천민의 집단 거주지인 향, 부곡이 있었다. 9주의 정비와 함께 북원경(강원도 원주), 중원경(충청 북도 충주),..
구급도감(救急都監) 고려시대 백성의 재난을 구휼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설치된 시기는 분명치 않고 1258년(고종 45)에 사(使)·부사(副使)·판관(判官) 각 2명과 녹사(錄事) 5명을 두었다. 폐지시기도 분명치 않다. 구제도감(救濟都監)고려시대 질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일을 맡아본 기관.1109년(예종 4) 개경(開京)의 백성들 사이에 질병이 유행하자 이들을 치료하는 한편, 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주기 위해 설치하였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죽으면 매장되지 못하고 들판에 방치되는 일이 예사로 있었다.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기구였는데, 1348년(충목왕 4) 진제도감(賑濟都監), 1381년(우왕 7)에 진제색(賑濟色)으로 이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