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체 글 (428)
히스토리아
금강산도(金剛山圖)금강산과 그 주변의 명승지를 표현한 그림. 현존하는 문헌 자료와 작품들을 살펴보면 금강산도라고 불리는 그림들은 금강산 지역과 그 주변의 해금강 지역, 관동 팔경의 명승들 그리고 때로는 설악산 지역까지를 포함하여 표현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금강산도는 고려시대 말 이후 현대까지 제작되면서 우리 나라 실경 산수화 전통의 성격과 특징, 화풍을 대변하는 분야로 자리를 잡았다.금강전도(金剛全圖)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鄭:1676~1759)의 대표적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1734년작.금강 내산을 부감 형식의 원형 구도로 그린진경 산수로 왼편에는 윤택한 토산들을 배치하고 오른 편에는 수직선으로 정의된 수많은 첨봉의 바위산을 그려 넣었다.
근정전(勤政殿)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경복궁의 정전.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정전(正殿)으로, 때로는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양로연(養老宴)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으로,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 지은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뒤 270여년 만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태조 때의 건물을 원래대로 복구한 것이 아니라 회랑(廻廊)을 단랑(單廊)에서 복랑(複廊)으로 바꾸고 월대(月臺 : 궁전 앞에 있는 섬돌)까지도 새로 만드는 등 변화가 있었다.경회루(慶會樓)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 누각.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重層) 팔작지붕건물. 국보 제224호. 근정전 서..
근우회(槿友會)1927년 5월 27일 민족단일당 조직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주의계·사회주의계 여성운동을 통합·단일화하여 창립한 여성단체.일제 치하에서의 여성 항일 구국 운동 및 여성 지위 향상 운동 단체이다.1931년에 해산되었다.관련항목 : 신간회
균전론(均田論)조선 영조 때에 실학자(實學者) 이익(李瀷)이 주장한 토지개혁론(土地改革論).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 이익은 《성호잡저(星湖雜著)》에서 '백성들은 날로 궁해지고 곤란해졌다. 국가의 위정자는 이와 같은 토지 겸병의 폐단을 제거하는 길로 균전제의 실시에 유념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였다.여전론(閭田論)조선 후기에 정약용(丁若鏞)이 주장한 토지개혁론. 일종의 협동농장제로서 전국의 토지를 국가소유로 하고, 농촌사회를 여(閭) 단위로 재편성한 다음 공동경작하여 노동량에 따라 소득분배하자는 공동농장제도이다. 1799년(정조 23)에 간행된 시문집 에 실려 있으며, 정전론(井田論)과 함께 정약용의 대표적인 토지개혁론이다. 여는 지세를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나눈 최하의 단위인데 보통 30호로 이루어..
균역법(均役法)조선시대 군역(軍役)의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만든 세법. 군역은 처음에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良人)에게 부과하여 이를 정군(正軍)과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번상(番上)하는 정군을 보인이 경제적으로 돕게 하였다. 정군의 번상제가 해이해지면서 중종 때부터는 번상대신 포(布)를 바치게 하는 군포제(軍布制)가 이루어지더니, 임진왜란 후 모병제가 실시되면서 군역은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규장각(奎章閣) 정조가 즉위한 1776년 궁중에 설치하였던 왕립 도서관으로서,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親筆)의 서화(書畵),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王世譜 왕실의 족보), 보감(寶鑑) 등을 보관 관리하던 곳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건국 이래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의 현실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는 데 있었다. 내각(內閣)이라고도 하였다. 규장각은 단순히 학문 연구와 도서 편찬의 일만이 아니라, 국왕의 정책 자문 기구로서의 역할이 컸다. 초기에는 홍국영(洪國榮)의 지휘 아래 정조의 적대 세력을 숙청하는데 앞장 섰으며, 정세가 안정되자 진보적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고 정치를 논하는 등 문물 정비에 힘썼..
구주대첩(龜州大捷)=귀주대첩1019년(현종 10)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구주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 앞서 1010년(헌종 1) 흥화진(興化鎭)의 수장 양규(楊規)가 거란 성종(聖宗)이 거느린 40만 대군을 구주 남쪽의 산악지대에서 대파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구주대첩이라 하면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을 총지휘관으로 한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10만의 거란대군을 상원수 강감찬(姜邯贊) 등이 구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한 전쟁을 말한다.구주는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제1차 침입 후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서희(徐熙)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고려의 점유를 인정받은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강동지방에 설치된 행정구역인 강동육주의 하나이다.
권반(權班), 잔반(殘班), 향반(鄕班) 조선 후기 양반의 증가는 양반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양반의 계층 분화를 초래하였다. 즉, 양반이라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붕당정치의 변질과 함께 양반 관료들의 정치적 대립과 분열은 더욱 가열되었고, 그로 말마암아 극소수의 집권 세력이 형성되는가 하면, 정계에서 탈락, 소외되는 절대 다수의 몰락 양반도 생겨났다. 이 때,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양반 가문이 권반인데, 흔히 벌열(閥閱)이라고도 하였다. 한 편, 정치 권력에서 탈락, 소외된 절대 다수의 양반들은 그 처지에 따라 다시 향반과 잔반으로 나뉘어졌다. 양반들은 관직에서 물러나면 대개 낙향하기 마련이었다. 향반은 토반(土班)이라고도 하였는데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