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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금오신화(金鰲新話 )조선 초기 세조 때 김시습(金時習)이 쓴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우리 나라 전기체 소설의 효시이다. 완본은 전하지 않고 5 편의 단편 소설만이 전해 온다. , , , ,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이 5편이 작자가 지은 전부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이 5편밖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그것도 국내에는 사본밖에 없고 일본에서 간행된 것이 1927년 제19호에 최남선에 의하여 소개되었다.평양․개성․경주 등 옛 도읍지를 배경으로 하여 우리 나라 고유의 신앙과 연결된 생활 감정과 역사 의식을 전기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금양잡록(衿陽雜錄) 조선 초 성종 때 강희맹(姜希孟)이 저술한 농서로서, 금양(오늘날의 경기도 시흥) 지방에서 직접지으면서 들은 농경 방법을 기술한 것이다. 1492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작물의 품종별 특색, 벼 재배법 등에 관한 내용이다. 이 책은 〈농가곡품〉 〈농담〉 〈농자대〉 〈제풍변〉 〈종곡의〉 〈선농기)〉로 농업기술과 농정에 관한 내용으로 나누어진다. 1581년(선조 14) 《농사직설》 내사본에 합본되어 간행되었고, 조선 후기 인조 때 신속이 쓴 농가집성(農家集成)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금산사미륵전(金山寺彌勒殿)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전.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지은 절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가 다시 지었다.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삼국시대의 금동반가사유상. 국보 제78호. 높이 83.2㎝. 제작시기, 제작국가, 출토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기록은 없으나,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코발트 60의 방사선을 투과, 촬영한 결과 7~8세기경 머리 부분과 몸체 부분을 따로 주초한 다음 연결 용접하여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자비의 미소를 띤 둥근 얼굴, 연꽃잎 등으로 장식된 보관, 몸을 따라 유려하게 흘러내린 천의, 입체적으로 조각된 신체 등 곡선미와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완벽한 주조기술과 세련된 감각을 조화시켜 놓아 우리나라 금동반가상의 최대걸작품으로 손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의 향로. 전체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 국보 제287호.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시대의 다양한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다정식 명칭은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 (扶餘陵山里出土百濟金銅大香盧)이다.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이 향로는 같은 박산을 표현한 6세기 전반(前半)에 제작된 백제 무령왕릉..
금난전권(禁亂廛權) 조선 시대에 국가가 시전 상인들에게 부여한 난전 (자유 상인)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조선 후기,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 상인들의 특권으로서,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말한다.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가진 시전 상인이 그 권리를 갖지 못한 사상(私商)이나 다른 시전 상인(즉, 난전 亂廛)으로 하여금 그 상품을 취급하지 못하도록 단속할 수 있는 권리로서, 그들의 상업 활동과 이익을 침해하는 상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17 세기 사상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들을 규제할 목적으로 처음에는 육의전에, 나중에는 모든 시전에 부여한 특권이었다. 그러나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을 과도하게 행사하여 물가가 상승하는 등 부작용이 일어나자, 정부로서도 더 이상 사상의 성장을 막을 수 ..
금관가야(金官伽倻) 6가야의 하나. 본가야(本伽倻)라고도 한다. 기원 전후 시기부터 532년까지 경상남도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존속하였다. 원래 9촌(村)의 장(長)이 각 촌을 다스리다가, 수로(首露)가 나와서 통일하였다. 금관가야는 수로왕 이래 491년 간 계속되다가 532년(법흥왕 19)에 신라에 멸망하였다. 금관경(金官京) 경남 김해시에 둔 통일신라시대의 소경(小京). 5소경으로, 가야연맹체의 붕괴로 금관국(金官國)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될 때 금관군이되었다가 680년(문무왕 20)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금관경이라 부르게 되었다. 경덕왕 때 김해경(金海京)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