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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기전체(紀傳體) 편년체(編年體)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중국의 전통적 역사 서술 방식에 편년체, 기전체, 기사본말체 등 세가지가 있다. [기전체(紀傳體)]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비롯되었다. 사기는 본기(本記 황제의 업적), 세가(世家 제후의 전기), 서(書 제도 문물, 후대에는 지 志로 바뀜), 표(表연표), 열전(列傳 각 분야의 저명한 개인의 전기)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본기(紀)와 열전(傳)만 있으면 기전체의 기본 요건은 갖추게 된다. 따라서 기전체는 인물 중심의 종합적 역사 서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 바 정사(正史)는 반드시 기전체로 편찬되어야 했으며, 이에 따라 기전체를 정사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사기", "한서(漢書)" 등 25사가 기전체로 편찬된 정사이다. 우리 나라..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가 망한 후 동쪽으로 망명하여온 기자와 그 자손들이 40여 대에 이르도록 왕을 지냈다고 하는 고조선의 일부 시기. 전통적인 상고사 인식체계에서는 고조선이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기자조선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우세하며 설사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고대사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조선 왕조기는 왕도 정치의 구현과 사대 관계의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와 외교로 인식되던 시대였다.그러므로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조선 왕조와 국호가 같았던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사실을 명예스러운 일이었다고 이해해 기자동래설이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다.
기인(其人)제도고려 시대,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지방 호족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아 수도에 머물게 한 제도. 그 기원은 신라의 상수리(上守吏) 제도에 있다. 차이점은, 신라의 경우에는 촌주(村主)와 같은 지방 세력가 당사자를, 고려의 경우는 호족과 같은 지방 세력가의 자제를 각각 인질로 삼은 점이다. 기인 제도는 호족 연합 정권의 성격을 지닌 고려 초, 고려 왕조와 호족 세력과의 호혜적 관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즉 고려 왕조는 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호족들에 대한 견제책으로서, 한편 호족은 그의 자제를 인질로 보내어 중앙의 관작을 받게 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중앙의 권위를 후광으로 지방에 군림하기 위한 목적에서 성립된 제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종에서 문종 ..
기업정비령기유약조(己酉約條)1609년(광해군 1) 일본과의 통교를 수락하기 위해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맺은 조약.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국교의 재개를 위한 일본의 끈질긴 노력 끝에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마도주에게 내린 세사미두는 100가마로 한다.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하고 특송선은 3척으로 하되 세견선에 포함한다. 수직인은 1년에 1회 내조(來朝)해야 하며, 다른 사람은 파견할 수 없다. 조선에 오는 모든 왜선은 대마도주의 징표를 소지해야 한다. 징표가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배를 대는 자는 모두 적으로 논한다. 왜관 체류 시일은 대마도주 특송선 110일, 세견선 85일, 그 밖은 55일로 한다 등이었다.
기술교육 조선 시대 기술학의 교육은 별도의 학교 설립없이 해당 관청에서 실시하였다. 즉, 외국어는 사역원(司譯院), 법률은 형조(刑曹), 의학은 전의감(典醫監), 천문과 지리는 관상감(觀象監)에서 각각 가르쳤다.
기기창(機器廠)1883년(고종 20) 무기제조관서로 설치된 기기국(機器局)에 부속된 공장. 조선 시대의 관아 (1883년 - 고종 20년)로 신식 기기를 만들기 위해 설치하였다.개항 이후 서양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하던 조정에서는 특히 신식무기의 도입 및 제조에 관심을 기울였다. 1880년에 새로 설치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 군물사(軍物司)·기계사(機械司) 등을 두어 우선 제도를 정비하였다.이어서 1881년 신사유람단과 영선사 일행을 파견하여 서양의 과학기술을 시찰, 습득하게 하였다. 청나라에 파견된 영선사는 함께 데리고 간 학도(學徒)와 공장(工匠)을 톈진기기국(天津機器局)에 배속시켜 화약·탄약 제조법, 그리고 각 분야의 자연과학지식과 외국어를 배우게 하였다.이들 영선사 일행은 1882년 말 ..
금입택(金入宅)신라시대 귀족들의 주택. ‘쇠드리댁’ 또는 ‘금드리댁’을 직역한 말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편 진한조(辰韓條)에 “신라 전성 시대에 수도인 경주에는 17만 8936호가 살았고, 행정 구역은 1,360방(坊), 55리(里)로 나뉘었으며, 금입택이 35채 있었다.”라고 했는데, 실제는 39채가 기록되었다.신라의 전성 시대란 삼국통일 이후 약 100여 년 간인 중대(654∼780)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성 시대는 경주가 수도로서 가장 번성했던 신라 말기, 즉 헌강왕 때이다.금입택은 대체로 신라 중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신라 말기에 이르러 전성 시대를 구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금입택은 이름난 것만을 기록했을 것이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