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체 글 (428)
히스토리아
관모답전(官謨畓田)신라시대 각 촌락에 분산된 국가 소유의 전답.민정문서(신라촌락문서)에 따르면 4개 촌에 각각 3∼4결(結)의 관모답전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서원경(西原京) 소속 촌락에는 따로 1결이 더 있었다. 그러나 그 면적은 4개 촌락의 전체 전답의 3%가 조금 못 되는 양이었다. 4개 촌락에 모두 관모답전이 있었던 것을 보면, 전국의 모든 촌락에 일정 기준의 관모답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연수유답전(烟受有畓田)통일신라시대 일반 민호(民戶)에서 보유 경작한 토지.신라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에 연수유전(烟受有田)과 연수유답(烟受有畓)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민호가 국가로부터 지급받아 가지고 있는 전답이라는 뜻으로 722년(성덕왕 21) 8월 백성에게 지급하였다는 정전(丁田)에 해당되는 것으..
민정문서(民政文書)통일신라시대 서원경(西原京:지금의 청주) 근처에 있던 4개 촌락에 대한 인문지리적 내용을 기록한 문서.장적 문서로 일본 도다이사(東大寺)의 쇼소원(正倉院) 소장. ‘신라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 ‘신라장적(新羅帳籍)’, ‘신라촌락장적(新羅村落帳籍)’, ‘신라촌장적(新羅村帳籍)’이라고도 한다.이 문서에는 사해점촌(沙害漸村)·살하지촌(薩下知村)·모촌(某村)·서원경모촌 등 4개촌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① 촌명(村名)·촌역(村域), ② 호(戶), ③ 인구(人口), ④ 우마(牛馬), ⑤ 토지, ⑥ 수목(樹木), ⑦ 인구·우마의 변동 등의 순서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촌 단위로 기록된 일종의 촌적(村籍)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동된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가 3년에 1번씩 재작성했다. 작..
동시(東市)509년(지증마립간 10)에 궁성의 동쪽에 만든 시장. 서시(西市)695년(효소왕 4) 경주에 설치된 시장의 하나. 남시(南市)695년(효소왕 4) 경주의 남쪽에 설치한 시장의 하나. 동시전(東市典)신라 지증왕 9년 경주에 설치된 동시(東市)의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만든 관청.남시전(南市典)신라시대 시장을 관리하던 관청(695-935)서시전(西市典)신라시대 서시(西市)의 업무를 관장한 관청.
금 줄요즘 남편들은 만삭 아내의 출산일이 다가와도 준비할 게 거의 없다. 하지만 지난 70년대 이전 아버지들만해도 마음과 몸이 함께 바빴다. 산모에게 먹일 미역, 탯줄을 자르고 묶을 가위, 실, 대야를 챙기고 볏짚을 모아 새끼도 꼬아야 했다. 또 이 새끼에 매달 숯, 청솔가지와 붉은 고추도 미리 준비해야 했다. 새끼줄과 그 장식품들은 “아기를 낳은 곳이니 출입을 삼가달라.”는 뜻으로 대문 밖에 내걸 ‘금줄’을 만드는데쓰였다.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하던 시절, 금줄에 걸린 붉은 고추는행인들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할 만큼 스스로 당당함을뽐냈다. 빈부격차나 신분의 고하, 지역을 가릴 것없이 새끼줄에 빨간 고추와 숯, 솔가지가 매달렸으면 아들이고 솔가지와 숯만 걸리면 딸이었다. ‘인줄’ 또는 ‘검줄’이라고도 불렸..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일반적으로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문자 사용의 여부이다. 선사 시대는 문자를 사용하지 못했던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말하고, 역사 시대는 문자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청동기 시대 이후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철기 시대부터 문자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적(義賊) 3인방 탐관오리나 나쁜짓을 일삼는 양반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도적을 의적(義賊)이라 한다. 조선시대 민심이 흉흉하던 때에 나타난 의적(義賊) 3인이 있었으니, 연산군 때의 홍길동, 명종 때의 임꺽정, 숙종 때의 장길산이 그들이다. 광해군때 허균이 쓴 '홍길동전'의 주인공인 홍길동은 연산군때까지 활약한 실존인물이다. 이 홍길동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경기도, 한양 등지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나쁜 관리나 양반들의 재물을 빼앗아 어려운 백성들을 도와주곤 했다. 그러다가 연산군 6년(1500)에 붙잡혀 귀양을 갔으며, 그 이후 홍길동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 후 약 60년 후인 명종때 임꺽정이 나타난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정치의 혼란과 관리들의 부정부..
제정일치(祭政一致) 신(神)을 대변하는 제사장(祭司長)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 또는 정치체제. 즉, 종교와 정치적 권력이 분리되지 않고 한 사람에 의해 집중된 정치체제가 제정일치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속적인 권력에 만족하는 정치지배자들과 종교전문가인 제사장들이 나누어지는데, 점차 힘과 권력은 세속적인 정치지배자나 왕에게 귀속되면서 종교도 그 밑에 예속된다. 한국의 경우는 전부족이 참여하는 큰 집단행사였던 부여.고구려의 제천의식(祭川儀式)에서 제정일치의 사회형태를 엿볼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처음에는 종교가 제정일치(theocracy)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점차 제정(祭政)의 분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시기는 별읍(別邑)이나 종교전문가인 천군(天君)이 등장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