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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근우회(槿友會)1927년 5월 27일 민족단일당 조직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주의계·사회주의계 여성운동을 통합·단일화하여 창립한 여성단체.일제 치하에서의 여성 항일 구국 운동 및 여성 지위 향상 운동 단체이다.1931년에 해산되었다.관련항목 : 신간회
균전론(均田論)조선 영조 때에 실학자(實學者) 이익(李瀷)이 주장한 토지개혁론(土地改革論).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 이익은 《성호잡저(星湖雜著)》에서 '백성들은 날로 궁해지고 곤란해졌다. 국가의 위정자는 이와 같은 토지 겸병의 폐단을 제거하는 길로 균전제의 실시에 유념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였다.여전론(閭田論)조선 후기에 정약용(丁若鏞)이 주장한 토지개혁론. 일종의 협동농장제로서 전국의 토지를 국가소유로 하고, 농촌사회를 여(閭) 단위로 재편성한 다음 공동경작하여 노동량에 따라 소득분배하자는 공동농장제도이다. 1799년(정조 23)에 간행된 시문집 에 실려 있으며, 정전론(井田論)과 함께 정약용의 대표적인 토지개혁론이다. 여는 지세를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나눈 최하의 단위인데 보통 30호로 이루어..
균역법(均役法)조선시대 군역(軍役)의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만든 세법. 군역은 처음에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良人)에게 부과하여 이를 정군(正軍)과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번상(番上)하는 정군을 보인이 경제적으로 돕게 하였다. 정군의 번상제가 해이해지면서 중종 때부터는 번상대신 포(布)를 바치게 하는 군포제(軍布制)가 이루어지더니, 임진왜란 후 모병제가 실시되면서 군역은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규장각(奎章閣) 정조가 즉위한 1776년 궁중에 설치하였던 왕립 도서관으로서,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親筆)의 서화(書畵),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王世譜 왕실의 족보), 보감(寶鑑) 등을 보관 관리하던 곳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건국 이래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의 현실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는 데 있었다. 내각(內閣)이라고도 하였다. 규장각은 단순히 학문 연구와 도서 편찬의 일만이 아니라, 국왕의 정책 자문 기구로서의 역할이 컸다. 초기에는 홍국영(洪國榮)의 지휘 아래 정조의 적대 세력을 숙청하는데 앞장 섰으며, 정세가 안정되자 진보적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고 정치를 논하는 등 문물 정비에 힘썼..
구주대첩(龜州大捷)=귀주대첩1019년(현종 10)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구주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 앞서 1010년(헌종 1) 흥화진(興化鎭)의 수장 양규(楊規)가 거란 성종(聖宗)이 거느린 40만 대군을 구주 남쪽의 산악지대에서 대파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구주대첩이라 하면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을 총지휘관으로 한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10만의 거란대군을 상원수 강감찬(姜邯贊) 등이 구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한 전쟁을 말한다.구주는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제1차 침입 후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서희(徐熙)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고려의 점유를 인정받은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강동지방에 설치된 행정구역인 강동육주의 하나이다.
권반(權班), 잔반(殘班), 향반(鄕班) 조선 후기 양반의 증가는 양반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양반의 계층 분화를 초래하였다. 즉, 양반이라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붕당정치의 변질과 함께 양반 관료들의 정치적 대립과 분열은 더욱 가열되었고, 그로 말마암아 극소수의 집권 세력이 형성되는가 하면, 정계에서 탈락, 소외되는 절대 다수의 몰락 양반도 생겨났다. 이 때,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양반 가문이 권반인데, 흔히 벌열(閥閱)이라고도 하였다. 한 편, 정치 권력에서 탈락, 소외된 절대 다수의 양반들은 그 처지에 따라 다시 향반과 잔반으로 나뉘어졌다. 양반들은 관직에서 물러나면 대개 낙향하기 마련이었다. 향반은 토반(土班)이라고도 하였는데 향..
권문세족(權門世族)고려 후기 사회을 이끌어 간 집권 세력으로서 무신 정권 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원의 간섭기에 그 골격이 갖추어 졌는데, 그 시기는 대체로 충렬왕 중엽 경이다. 이들 가운데는 전기부터 이어 온 전통적 문벌 귀족 출신, 무신 정권 시대에 등장한 신흥 가문 출신도 있었으나, 대개는 원의 간섭기에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출세한 자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도평의사사를 장악하여 귀족 연합적인 정치를 운영함으로써 왕권을 약화시켰다. 경제적으로는 노비 소유와, 산천을 경계로 삼는다고 할 정도로 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감으로써 국가 재정 기반을 잠식하였다. 이성계 일파의 위화도 회군과 전제 개혁을 통해 정치적.경제적으로 몰락하였다. 관련항목 : 문벌귀족, 신진사대부
권농사(勸農使)고려시대 농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했던 임시관직.태조를 비롯하여 역대 왕들은 농업진흥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성종 이후에는 농토개발을 강조하고 특별히 권농사를 설치하여 농사를 격려했다. 권농사에는 2가지 경우가 있었다. 하나는 중앙정부가 지방관에게 권농(勸農)의 임무를 부여하여 권농사를 겸임하게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6품 관원에게 권농의 임무만을 지닌 권농사로 임명하여 각 지방에 파견하는 경우이다. 이들은 지방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의창(義倉)의 쌀과 소금을 내어 난민을 구하거나 종곡(種穀)을 나누어주고 농경을 격려하는 임무를 지녔다. 또한 곡물·포 등의 특산물을 거둬들여 왕을 비롯한 중앙 지배층에게 공급하는 것도 주요 임무였는데, 이때 권농사들이 특산물을 과도하게 수취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