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국사써브노트 (365)
히스토리아
기인(其人)제도고려 시대,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지방 호족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아 수도에 머물게 한 제도. 그 기원은 신라의 상수리(上守吏) 제도에 있다. 차이점은, 신라의 경우에는 촌주(村主)와 같은 지방 세력가 당사자를, 고려의 경우는 호족과 같은 지방 세력가의 자제를 각각 인질로 삼은 점이다. 기인 제도는 호족 연합 정권의 성격을 지닌 고려 초, 고려 왕조와 호족 세력과의 호혜적 관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즉 고려 왕조는 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호족들에 대한 견제책으로서, 한편 호족은 그의 자제를 인질로 보내어 중앙의 관작을 받게 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중앙의 권위를 후광으로 지방에 군림하기 위한 목적에서 성립된 제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종에서 문종 ..
기업정비령기유약조(己酉約條)1609년(광해군 1) 일본과의 통교를 수락하기 위해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맺은 조약.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국교의 재개를 위한 일본의 끈질긴 노력 끝에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마도주에게 내린 세사미두는 100가마로 한다.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하고 특송선은 3척으로 하되 세견선에 포함한다. 수직인은 1년에 1회 내조(來朝)해야 하며, 다른 사람은 파견할 수 없다. 조선에 오는 모든 왜선은 대마도주의 징표를 소지해야 한다. 징표가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배를 대는 자는 모두 적으로 논한다. 왜관 체류 시일은 대마도주 특송선 110일, 세견선 85일, 그 밖은 55일로 한다 등이었다.
기술교육 조선 시대 기술학의 교육은 별도의 학교 설립없이 해당 관청에서 실시하였다. 즉, 외국어는 사역원(司譯院), 법률은 형조(刑曹), 의학은 전의감(典醫監), 천문과 지리는 관상감(觀象監)에서 각각 가르쳤다.
기기창(機器廠)1883년(고종 20) 무기제조관서로 설치된 기기국(機器局)에 부속된 공장. 조선 시대의 관아 (1883년 - 고종 20년)로 신식 기기를 만들기 위해 설치하였다.개항 이후 서양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하던 조정에서는 특히 신식무기의 도입 및 제조에 관심을 기울였다. 1880년에 새로 설치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 군물사(軍物司)·기계사(機械司) 등을 두어 우선 제도를 정비하였다.이어서 1881년 신사유람단과 영선사 일행을 파견하여 서양의 과학기술을 시찰, 습득하게 하였다. 청나라에 파견된 영선사는 함께 데리고 간 학도(學徒)와 공장(工匠)을 톈진기기국(天津機器局)에 배속시켜 화약·탄약 제조법, 그리고 각 분야의 자연과학지식과 외국어를 배우게 하였다.이들 영선사 일행은 1882년 말 ..
금입택(金入宅)신라시대 귀족들의 주택. ‘쇠드리댁’ 또는 ‘금드리댁’을 직역한 말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편 진한조(辰韓條)에 “신라 전성 시대에 수도인 경주에는 17만 8936호가 살았고, 행정 구역은 1,360방(坊), 55리(里)로 나뉘었으며, 금입택이 35채 있었다.”라고 했는데, 실제는 39채가 기록되었다.신라의 전성 시대란 삼국통일 이후 약 100여 년 간인 중대(654∼780)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성 시대는 경주가 수도로서 가장 번성했던 신라 말기, 즉 헌강왕 때이다.금입택은 대체로 신라 중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신라 말기에 이르러 전성 시대를 구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금입택은 이름난 것만을 기록했을 것이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
금위영(禁衛營)조선 시대에 5영 중의 하나로 서울의 호위 임무를 맡았던 군영 ※ 5군영(五軍營)임진왜란을 계기로 서울과 그 외곽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5개의 군영.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 금위영(禁衛營)· 수어청(守禦廳)으로, 5영문(五營門)이라고도 한다. 이중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도성을 직접 방어하는 중앙군영이며, 총융청· 수어청은 서울의 외곽을 방어했다.
금오신화(金鰲新話 )조선 초기 세조 때 김시습(金時習)이 쓴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우리 나라 전기체 소설의 효시이다. 완본은 전하지 않고 5 편의 단편 소설만이 전해 온다. , , , ,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이 5편이 작자가 지은 전부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이 5편밖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그것도 국내에는 사본밖에 없고 일본에서 간행된 것이 1927년 제19호에 최남선에 의하여 소개되었다.평양․개성․경주 등 옛 도읍지를 배경으로 하여 우리 나라 고유의 신앙과 연결된 생활 감정과 역사 의식을 전기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금양잡록(衿陽雜錄) 조선 초 성종 때 강희맹(姜希孟)이 저술한 농서로서, 금양(오늘날의 경기도 시흥) 지방에서 직접지으면서 들은 농경 방법을 기술한 것이다. 1492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작물의 품종별 특색, 벼 재배법 등에 관한 내용이다. 이 책은 〈농가곡품〉 〈농담〉 〈농자대〉 〈제풍변〉 〈종곡의〉 〈선농기)〉로 농업기술과 농정에 관한 내용으로 나누어진다. 1581년(선조 14) 《농사직설》 내사본에 합본되어 간행되었고, 조선 후기 인조 때 신속이 쓴 농가집성(農家集成)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