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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남부여(南夫餘)538년(성왕 16) 백제가 서울을 웅진(熊津)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기면서 한때 사용했던 국호.남부여라는 국호는 백제가 성왕 때 중흥을 꾀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하여 멸망할 때까지 별칭으로 썼다. 이는 백제왕실이 당시까지도 스스로 부여족의 한 갈래임을 자처하고 있었던 증거의 하나이다.
남면북양 정책(南綿北羊政策) 1930년대 일제의 공업 원료 증산 정책의 하나이다. 일제는 1930년 산미증식계획이 자국민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자,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해 한반도를 원료 공급지로 이용하려는 공업 원료 증산 정책을 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써 남쪽에서는 목화를 재배하고, 북쪽에서는 양을 사육할 것을 우리 농촌에 강요하였던 것이며, 이를 남면북양정책이라 한다.
난전(亂廛)조선시대 전안(廛案)에 등록되지 않은 신흥 상공업자의 상행위 또는 그러한 가게. 판매를 허가 받지 않고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나 시설을 말한다.봉건적 어용상단(御用商團)으로서의 특권을 가지지 않은 자가 상행위를 함으로써 봉건적 상업 구조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조선은 초기부터 육의전(六矣廛)을 중심으로 서울의 국지적 시장권을 장악하는 많은 시전(市廛)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는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육의전에 그 보상으로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였다. 이 제한을 넘어서서 임의로 상행위를 하면 난전으로 규정하고 금단하였다.※전안(廛案) : 시전에서 취급하는 상품의 종류와 상인의 주소·성명을 등록한 공적인 문서. 1706(숙종32)년에 실시.관련항목 : 금난전권, 시전
낙랑군(樂浪郡)1. 평안북도 영변군에 있던 옛 고을인 위천현(渭川縣)의 옛 이름.2. 고조선 멸망 후 한(漢)나라가 고조선의 옛 땅에 설치한 4군의 하나.한사군의 위치를 중국의 요동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한반도 중 북부 및 남만주 일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낙랑군의 관할지역은 오늘날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낙랑군은 BC 108년 한 무제(武帝)에 의해 옛 고조선의 중심부에 설치되어 이후 약 400여 년간 동방에 대한 중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침투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조선현(朝鮮縣)을 수현(首縣)으로 하고 11개의 속현을 거느리며 출발한 낙랑군은 한사군의 중심지였다. BC 82년에는 옛 진번군(眞番郡)의 7현에 남부도위가, 옛 임둔군(臨屯郡)..
나성(羅城)안팎의 이중으로 된 성곽의 바깥 성벽 . 자성 또는 내성. 황성. 재성의 바깥에 있는 넓은 주거지까지 에워싼 이중의 성벽을 일컫으며, 나곽이라고도 한다. 특히 도성의 구조에서 왕궁과 관청을 두른 왕성이나, 재성의 둘레에 있는 일반 주거지를 포용하여크게 쌓은 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흔히 쓴다.
나선정벌(羅禪征伐)조선이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군을 무찌른 싸움. 두 번에 걸쳐 조총군을 파견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1654년(효종5년)에 러시아가 헤이룽강 유역으로 침입하자 청나라가 원병을 요청하므로 변급 등을 파견하였고, 1658년(효종9년)에는 다시 신유 등을 파견하여 러시아군을 무찔렀다. 당시는 조선에서 북벌운동이 무르익어 갈 즈음으로, 조총군을 파견한 것은 북벌계획의 가능성을 타진해 본 것이다.
나제동맹(羅濟同盟)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맺은 동맹.5세기 433년에 장수왕의 남하 정책에 위협을 느낀 백제(비유왕), 신라(눌지왕) 두 나라가 맺은 공수(攻守 - 공격과 방어를 같이 함) 동맹이 그 시초이다. 그 뒤 혼인 동맹(백제 동성왕과 신라 소지왕)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6세기에는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 실지(失地 - 잃었던 땅)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 지역을 신라가 다시 빼앗자(진흥왕의 배반),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 났고, 성왕은 전사하였다. 이로써 120여 년 간 지속되었던 나제 동맹은 결렬되고 말았다.
나당전쟁(羅唐戰爭)신라는 진덕 여왕 2년(648), 당시 나당 연합군이 승리하면 평양 이남의 전 지역을 신라가 소유한다는 약정을 맺은 바 있었다. 그러나 백제의 멸망 후(660), 당은 백제 지역에 5 도독부를 두는 한편, 이이제이(以夷制夷 - 이웃 나라끼리, 또는 이웃 나라의 내부 세력끼리 서로 대립시키는 정책)의 외교 정책으로 신라의 내부 분열을 획책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당의 대립은 차츰 심각해져 갔다. 신라는 고구려가 망하고(668), 당의 주력군이 철수하자 고구려 유민과 합세하여 당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로써 나당 간의 대립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