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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414년(장수왕 3)에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 사면석비(四面石碑)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동쪽 국강상(國岡上)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 글자를 본떠서 일명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고려시대의 미륵보살입상. 보물 제218호. 높이 18.2m. 화강암으로 만들으며, 968년(고려 광종 19)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관촉사에 있다.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며,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주름선이 간략화되어 단조롭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만든 관음..
관찰사(觀察使) 조선시대 외관직 문관의 종2품 벼슬. 전국 8 도에 파견되었으며, 일명 감사(監司)라고도 하였다. 또 지방의 우두머리라는 뜻에서 방백(方伯)이라고도 하였다. 이들은 병마절도사(兵使)·수군절도사(水使)의 무관직을 겸하기도하였고, 감영 소재지의 부윤(府尹)이나 목사(牧使) 등을 겸함으로써 그 권한은 더욱 확대되어 사실상 행정·사법·군사의 3 권을 장악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안렴사·관찰출척사라 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안렴사·관찰사·관찰출척사 등의 이름으로 자주 바뀌었으며 관찰사로 굳어진 것은 7대 세조 때부터였다. 중요한 정사에 대해서는 중앙의 명령을 따라 시행하였지만, 자기 관하의 도에 대해서 민정·군정·재정·형정 등을 통할하여 지방행정상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관하의 수령을 지휘 감독..
관수관급제관장(官莊)고려·조선시대에 관수품(官需品) 조달을 위하여 관공장(官工匠)을 사역하여 생산활동을 하였던 관영공업.
관산성(管山城)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에 있었던 삼국시대의 성.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신라가 동맹을 깨뜨리고 백제의 영토인 한강유역을 점령하자 554년(신라 진흥왕 15)에 백제는 일본에 원군을 청하는 한편,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그러나 이 싸움에서 백제는 김무력(金武力)·고간(高干) 등이 거느린 신라군에 크게 패하여 성왕은 전사하고 좌평 4인, 군졸 2만9600여인이 전사하였다. 이 곳 싸움으로 나제동맹은 깨어졌고 신라는 한강유역을 점유하여 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관산성의 위치는 백제성왕사절지(百濟聖王死節地)로 전해지고 있는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과 이곳에서 맞은편 서북방으로 약 800m 떨어져 있는 환산성(環山城 : 일..
관료전(官僚田) 신라시대의 토지제도. 관원들에게 녹봉 대신에 준 토지로서, 계급에 따라 결수에 차등이 있었다. 687년(신문왕 7) 녹읍제 대신 설치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폐지시키고 다시 녹읍제를 부활시켰다.관련항목 :녹읍
관동학회(關東學會) 1908년 3월 서울에서 강원도 출신 인사들과 유학생들이 설립한 학회. 설립 목적은 당시 실질적인 국권침탈 상황에서 국권 회복을 위하여는 무엇보다 교육과 민중의 계몽이 중요함을 각성한 인사들이 민중을 계몽, 교육함으로써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한 것이 었으며 아울러 동향인의 단결과 협조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학회는 원래 1907년 7월 동도홍학회로 발족하여 1908년 3월 관동학우회로 발전하였고 곧 관동 학회로 개칭하였다.
관동별곡(關東別曲)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시인인 송강 정철의 가사. 1580년(선조 13) 정월 작자가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내·외·해금강과 관동팔경등의 절승을 두루 유람한 후 그 도정과 산수·풍경·고사·풍속 및 자신의 소감 등을 읊은 노래로, 조선시대 가사 가운데서도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한 백미편이다. 음률이 주로 3·4조로 이루어진 이 가사의 용어는 비교적 순수한 우리말이 많고, 비록 한문어휘라 하더라도 대개 우리말화한 것들이다. 또한 이 가사는 파란이 심하였던 작자의 관직생활에서 비교적 득의에 찼던 시절의 작품인 만큼 전체의 분위기가 웅장하고 명쾌하여 화려체의 문장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대구법의 묘를 살리면서 감탄사를 적절하게 첩용하고 생략법을 알맞게 구사하는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