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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개국공신(開國功臣)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새로운 왕조 성립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준 공신 칭호.고려의 개국에는 태봉왕(泰封王) 궁예를 물리치고 왕건을 고려 태조로 추대한 사람들을 개국공신이라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포상하였다. 1등공신에는 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이 책록되었고, 2등공신에는 견권(堅權)·권능식(權能寔)·권신(權愼)·염상(廉湘)·김락(金樂)·연주(漣珠)·마난(麻煖)·최응(崔凝)·유금필(庾黔弼)·이총언(李忿彦) 등 100여 명이 책록되어 금은그릇·비단 ·능라(綾羅)·포백(布帛)이 사급되었으며, 3등공신에는 2,000여 명이나 책록되었다.조선은 1392년 8월 개국의 논공행상을 위한 공신도감을 설치하고, 1개월의 심의 끝에 공신 44명을 가려 이를 1·2..
강조의정변(康兆의政變)목종의 모후인 천추 태후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왕위를 빼앗으려 하자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한 사건(1009년 고려 목종 12).
강동6주(江東六州)고려 성종 때 서희(徐熙)와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의 강화회담에 의해 얻은 서북면(西北面)의 6개 주(州).지금의 평안북도 서북 해안지대에 설치하였던 6주즉흥화(興化;義州 동쪽)·용주(龍州;龍川)·통주(通州;宣川)·철주(鐵州;鐵山)·구주(龜州;龜城)·곽주(郭州;郭山)를 말한다. 고려시대 서북면(西北面) 해안지대에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태조때부터 추진해온 북진정책에 큰 장애가 되었다. 그런데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의 제1차 침입 때 서희(徐熙)가 거란의 장군 소손녕(簫遜寧)과 담판함으로써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편입했다. 당시 소손녕은 고려 침입의 이유를 첫째로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자기네의 소유인데 고려가 침식했으며, 둘째로는 자기 나라와 접경하고..
강동성의 싸움, 강동(江東)의 역(役) 고려·몽고·동진국의 연합군이 강동성(지금의 평안 남도 강동)에서 거란족을 격퇴한 싸움. 강동(江東)의 역(役)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추격을 피해 고려로 피신해 온 거란족이 강동성에 머물자 몽고와 동진국의 연합군이 이들을 추격해 왔고, 이에 고려는 불가피하게 공동 작전에 임하여 마침내 고종 6년(1219)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이 때 고려와 몽고군 사이에는 형제의 맹약이 체결되었고, 이후 고려는 맹약의 조건에 따라 몽고에 세공(歲貢)을 바쳐야 했다. 고려의 북쪽 축성이 청천강,박강 유역에 집중된 것은 북방민족으로부터 국경선을 수호하려는 고려인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였다. 강동 6주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주요격전지로 거란군을 잘 막아낸 곳이다. 군사·교통상 요..
5대10국중국 당(唐)나라 멸망(907)후 통일왕조인 송(宋)나라가 등장(960)하기까지에 걸쳐 흥망한 여러 나라.당이 멸망하고 중국은 5대10국 시대로 접어들고, 이는 송의 건국까지 계속된다.즉 이 시기에 중국 북부지방의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 등 5왕조와 중국 남부의 전촉(前蜀)ㆍ후촉(後蜀)ㆍ오(吳)ㆍ남당(南唐)ㆍ오월(吳越)ㆍ형남(荊南)ㆍ민ㆍ초(楚)ㆍ기(岐)ㆍ연(燕)ㆍ남한(南漢)ㆍ북한(北漢) 등 10국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를 5대10국이라 한다.
고려시대의 중앙군사조직을 '2군6위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기원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정부가 지방의 호족들이 사적으로 유지하던 군사력을 일원적인 중앙군조직으로 재편성하려고 노력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중앙군 조직의 재편성은 태조 때부터 시도되었는데, 성종 때를 전후하여 지방의 군사력이 해체되고 2군과 6위의 새로운 군사조직이 마련되었다.이군(二軍)고려시대 경군(京軍)의 핵심부대인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의 통칭.고려시대 중앙군의 조직. 고려의 군사조직은 태조가 후삼국 정벌에 동원 했던 군대가 기간이 되어 조직되었다.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의 2개의 군영으로 편성되었으며, 2군은 6위보다 후인 현종때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6위의 상위에 있던 친위군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6위(六衛)고려..
관모답전(官謨畓田)신라시대 각 촌락에 분산된 국가 소유의 전답.민정문서(신라촌락문서)에 따르면 4개 촌에 각각 3∼4결(結)의 관모답전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서원경(西原京) 소속 촌락에는 따로 1결이 더 있었다. 그러나 그 면적은 4개 촌락의 전체 전답의 3%가 조금 못 되는 양이었다. 4개 촌락에 모두 관모답전이 있었던 것을 보면, 전국의 모든 촌락에 일정 기준의 관모답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연수유답전(烟受有畓田)통일신라시대 일반 민호(民戶)에서 보유 경작한 토지.신라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에 연수유전(烟受有田)과 연수유답(烟受有畓)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민호가 국가로부터 지급받아 가지고 있는 전답이라는 뜻으로 722년(성덕왕 21) 8월 백성에게 지급하였다는 정전(丁田)에 해당되는 것으..
민정문서(民政文書)통일신라시대 서원경(西原京:지금의 청주) 근처에 있던 4개 촌락에 대한 인문지리적 내용을 기록한 문서.장적 문서로 일본 도다이사(東大寺)의 쇼소원(正倉院) 소장. ‘신라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 ‘신라장적(新羅帳籍)’, ‘신라촌락장적(新羅村落帳籍)’, ‘신라촌장적(新羅村帳籍)’이라고도 한다.이 문서에는 사해점촌(沙害漸村)·살하지촌(薩下知村)·모촌(某村)·서원경모촌 등 4개촌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① 촌명(村名)·촌역(村域), ② 호(戶), ③ 인구(人口), ④ 우마(牛馬), ⑤ 토지, ⑥ 수목(樹木), ⑦ 인구·우마의 변동 등의 순서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촌 단위로 기록된 일종의 촌적(村籍)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동된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가 3년에 1번씩 재작성했다.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