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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경보(經寶)고려 정종(定宗) 때 불교진흥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장학재단. 불명경보(佛名經寶)라고도 한다.'보(寶)'란, 곧 기금(基金)을 뜻하는 당시의 말로, 일정한 사업을 운영하기 위한 자원을 마련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식 등을 통하여 재단을 지속·운영시켜 나간다. 이 재단은 946년(정종 1) 왕이 불법(佛法)을 배우는 문도(門徒)들을 위하여 쌀 7만 석을 전국의 주요 사찰에 하사함으로써 광학보(廣學寶)와 함께 발족하였다. 이런 장학재단은 이후 헌종 때 불경간행기금인 반야경보(般若經寶)가 설치되고, 이어 문종 때 팔관회(八關會)의 의식 기금인 팔관보(八關寶)가 국가기구로서 재정비됨으로써 상호 연계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결혼도감(結婚都監)고려시대 원(元)나라에서 요구하는 여자를 선발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청.고려시대 원나라의 요구로 만자(蠻子 : 남송인으로 원나라에 항복한 사람)에게 시집보낼 여자를 뽑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 1274년(원종 15)에 설치.1274년(고려 원종 15) 원은 고려에 공녀 140명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이 일을 위해 결혼도감(結婚都監) 또는 과부처녀 추고별감(推考別監)을 설치하여 징발한 여자 140명을 구해 보내주었다. 관련항목 : 공녀- 이명로의 얄개노트 -
건원중보 동국통보 동국중보 삼한통보 삼한중보해동통보 해동중보은병(활구)고려시대 때 유통되었던 화폐들이다.왕권강화와 상업진흥을 도모하던 숙종대에는 화폐에 대하여 적극적인 정책을 채택하고.주전도감에서 화폐를 만들었는데,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유통 체제였던 물품화폐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가재정과 국민경제를 증진하기 위해 명목화폐인 주화(鑄貨 : 銅錢)를 주조, 유통시키게 되었다.숙종대의 화폐 유통책은 주로 국가 재정의 확보에 있었으며, 윤관(尹瓘)과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대표적인 화폐 유통론자였다.동전화폐를 중앙 및 지방에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과조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종 때에 이르러서는 해동통보를 비롯한 각종 동전의 유통은 중단되었다. 명목화폐인 주화를 수용할 사회경제적 여건이..
칠대실록(七代實錄)고려시대의 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 7대의 실록. 총 36권. 고려 최초의 실록.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궁궐 안에 있던 사관(史館)이 불타, 이곳에 보존된 사료들도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따라 현종은 1013년 9월 수찬관(修撰官) 황주량(黃周亮) ·최충(崔冲) ·윤징고(尹徵古) 등에게 그의 앞 대(代)까지의 7대, 즉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의 실록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명을 받은 편수관들은 널리 사료를 수집하고, 옛 사실을 알고 있는 노인들을 탐방 취재하여 1034년(덕종 3) 이를 완성하였다. 다른 고려실록과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제도(科擧制度)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관료를 채용하기 위하여 치른 임용시험제도.[1] 고려시대 1) 과거 제도 ① 종류 : 제술과, 명경과는 문신 채용 시험이고, 잡과는 기술관 채용 시험임 ㉠ 제술과 - 한문학과 시무책(정책)으로 시험 ㉡ 명경과 - 유교 경전으로 시험 ㉢ 잡과 - 기술학(의학·천문학·음양 지리 등)으로 시험 ② 응시 자격 ― 원칙적으로 양인 이상이면 응시 가능. 그러나 실제로는 농민은 응시 불가능 ③ 특징 : 무신 등용을 위한 무과는 없었음 2) 과거의 예외 : 음서 제도 ① 공신 및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제도 ② 공음전 제도와 함께 고려 문벌 귀족 사회 강화의 중요한 기반[2] 조선시대 ① 응시 자격 : 양인 이상(그러나 교육 기회가 양반에..
공신전(功臣田) 공음전(功蔭田) 공해전(公廨田) 공신전(功臣田) 1391년(고려 공양왕 3) 토지제도 개혁 때 과전 외에 공신에게 주던 토지. 이 때의 전제개혁으로 공음전을 공신전으로 정비하였고, 조선 개국 초 개국공신들에게 3등으로 분류하여 공신전을 나누어 주었다. 1407년(태종 7)에는 전지체급법을 제정하여 공신이 죽은 후에 그의 적자가 없을 경우, 첩자에게 주도록 하였다. 1416년 10월에 공신전의 상속제가 이루어졌으며, 25년(세종 7) 10월에 공신전은 과전 외에 지급하는 것이며, 계승하는 자손에게 영구히 상속하게 한다고 정하고, 자손이 없을 때에는 국가에 반환하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1등에 전(田) 200결, 2등에 150결, 3등에 100결이었다.공음전(功蔭田) 공음전은 고려 시대, 5..
양수척(楊水尺)후삼국으로부터 고려에 걸쳐 떠돌아다니면서 천업(賤業)에 종사하던 무리. 일명 수척 (水尺)·화척(禾尺)·무자리라고도 한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제어하기 어려웠던 유종(遺種)의 후예라고도 하지만 이에 관한 정확한 사료는 없는 편이며, 일반적으로 여진의 포로 또는 귀화인의 후예들이라고 알려져 있다.변경지대에 주로 많이 살았고 수초(水草)를 따라 떠돌아다니면서 사냥과 유기(柳器 : 고리)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양수척은 백제(百濟)의 유종(遺種)으로 본래 관적(貫籍)과 부역(賦役)도 없고, 즐겨 수초(水草)를 따라 옮겨 사는 것이 무상하여 오직 사냥•도우(屠牛)•유기(柳器)를 엮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며, 대개 기녀(妓女)의 종족은 본래 유기장(柳器匠)의 집에서 나왔다..
거란장(契丹場)고려시대 거란 유민(契丹遺民)들이 고려에 와서 함께 모여 살았던 곳. 고려는 993년(성종 12) 거란의 침입을 시작으로 1125년(인종 3) 거란인이 세운 요(遼)가 멸망한 후까지 거란과 자주 충돌하였다. 이 때부터 고려에는 거란군 포로나 투항해 온 자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특히 1216년(고종 3) 걸노(乞奴)가 이끄는 9만의 거란유민군이 고려를 침범한 이후 거란의 항쟁은 극에 이르렀으나, 1219년 장군 김취려(金就礪) ·조충(趙沖)의 활약과 몽골 장군 합진(哈眞)의 도움으로 거란유민의 3년에 걸친 항전은 종식되었다. 거란유민과의 이 마지막 싸움이 끝난 후 몽골 장군 합진은 거란의 부녀와 사내아이[童男] 700명을 거란군에 잡혀 있던 고려인 200명과 함께 고려에 넘겨주고 나머지 거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