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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간도(間島)]중국 동북부의 한국인 거주지역.넓게는 지린성(吉林省)을 중심으로 랴오닝성(遼寧省)을 포함한 창바이산맥(長白山脈) 일대의 서간도와 두만강 북부의 북간도(혹은 동간도)를 함께 지칭하며, 좁게는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가 있는 북간도 만을 말한다. 남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함경북도와 마주하고, 동쪽은 러시아연방의 연해주에 접한다.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주민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그 밖에 목축과 임업에 종사한다. 농산물로는 쌀· 보리· 수수· 콩· 옥수수가 재배되며, 광물로는 석탄· 유모혈암(油母頁岩)· 구리· 납 등의 매장량이 많다. 간도는 원래 초기 국가였던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때와 조선 초기에는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으나 18..
간경도감 (刊經都監)조선 초기 세조 때 불경의 국역과 판각을 관장하던 관립기관.1461년(세조 7) 6월에 왕명으로 설치하여, 1471년(성종 2) 12월에 폐지하기까지 11년간 존속하였다. 세조는 대군 때부터 불교를 좋아하여 부왕인 세종의 불서 편찬 및 간인(刊印)을 적극 도왔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찬탈을 속죄하고 불교에 심취하였다. 1457년(세조 3) 왕세자가 병으로 죽자 왕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친히 불경을 사성(寫成)하였다.또한 대장경 한 질을 비롯한 많은 불경을 경판에서 찍었으며, 법화경 등 여러 종류의 불경을 활자로 인출하기도 하였다. 1458년에는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대찰에 분장(分藏)하도록 하였다.이것은 세조의 숭불정책 구현을 위한 첫 사업이었다. 또, 1..
가야(伽倻) 고대 변한 땅에 세워진 국가들의 통칭. 가야· 가라·가락이라고도 한다. 가야에 속하는 국가들은 금관가야·대가야·소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고령가야이다. 이 중에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금관가야와, 이진아시를 시조로 하는 대가야가 가장 강한 맹주국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강한 통치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다가, 562년(진흥왕 23년)에 신라장수 이사부, 사다함에 의해 정복 당하였다.
가부장적 가족제도 가족 집단의 장(長)인 가장은 호적 제도나 그밖의 공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호주로 일컬어지며, 가족 공동체의 지휘 통솔자이다. 따라서, 가족 집단의 질서는 가부장제적인 권위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서는 조상 숭배에 입각한 가(家)의 영속성을 중시하며, 가장이 가족을 대표하고, 모든 면에 통제적 기능을 가지며, 가부장을 정점으로 존비(尊卑), 장유유서(長幼有序), 남녀유별의 상하 위계 질서가 확립되고, 사회 전체가 이것을 지지, 승인해 주며, 가부장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가산(家産)이 있다. 그리하여가족은 가장의 허락을 거치지 않고 임의로 가산을 처분하거나, 또는 그의 동의없이 가산에 부담이 될 계약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조선시대)
[가면극, 탈춤, 탈놀이]세 가지는 동의어로 본다.가면을 쓴 참가자들이 집 주인에게 선물을 증정하고 함께 의식(儀式)의 춤을 추기 위해 모이는 축제 또는 여흥을 말한다.전형적인 가면극은 무대의상을 입고 가면을 쓴 동성(同性)의 사람들이 한 무리가 되어, 횃불을 든 사람과 함께 사교 모임에 나타나 손님들과 더불어 춤추고 담화하는 것이었다.한국 탈놀이(가면극)의 기원에 대해서는 농경의례설(農耕儀禮說)·기악설(伎樂說)·산대희설(山臺戱說)의 세 가지가 논의되어 왔다. 고구려의 무악(舞樂),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處容舞)와 오기(五伎)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륙에서 전래된 산악백희(散樂百戱)가 향악화(鄕樂化)되고, 고려의 산대잡극으로 이어지며, 조선 전기에는 사찰기악의 민속극화가 이루어졌다.이러한..
가(加)· 대가(大加) 부여, 고구려 등에서 쓰이던 족장의 칭호. 나중에는 관직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부여에서는 가축의 이름을 따 마가(馬加 - 말), 우가(牛加 - 소), 저가(猪加 - 돼지), 구가(狗加 - 개)라 하였는데, 이들이 왕을 추대하기도 하고, 흉년이 들면 왕에게 그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5부족의 족장의 후예들을 대가(大加)라 하였다. 부여나 초기의 고구려에서는, 왕과 마찬가지로 이들 가(加)도 대사자, 사자(이상 부여)나 사자, 조의, 선인(이상 고구려) 등 자신의 관리들을 거느린 반면에 중앙에는 별도의 관직이 없었다. 이것은 이 나라들이 아직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룩하지 못하고 연맹 왕국 단계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경천사10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고려 말에 건립된 대리석 석탑. 국보 제86호. 높이 13.5 m. 원래 경기 개풍군 광덕면에 있었는데 한말에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불법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 후 반환되었으나 파손이 심하여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가 1959-60년에 재건되었고, 다시 1995년 해체된 후 문화재연구소·한국자원연구소·원자력연구소의 공동작업으로 1998년까지 완벽 보존처리하기로 하였다. 석탑의 형식은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신라형식을 이은 평면직사각형이다. 당시에는 이미 새로운 양식인 다각 석탑이 나타났으나, 이 석탑은 그런 유형을 따르지 않은 특수한 형태를 갖추어 이색적이다.
* 고려의 경시서(京市署)고려시대 개경(開京)의 시전(市廛)을 관리·감독하던 관청. * 조선의 경시서(京市署)조선전기 호조의 속사(屬司)로 물가의 조절 및 상인들의 감독, 세과(稅課)의 감독을 맡아 본 관청.고려 문종 때 수도인 개경의 시전을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영(令) 1인, 승(丞) 2인을 두었으며, 이속(吏屬)으로 사(史) 3인, 기관(記官) 2인을 두었다.충렬왕 때는 영을 권참(權參)으로 개칭하였고, 승을 3인으로 증가시켰으며, 공민왕 때에는 정7품인 승을 강등하여 종8품으로 하였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는데, 1392년(태조 1) 새 왕조를 세운 태조가 모든 법률과 제도를 고려의 것을 계승함에 따라 경시서도 이에 따랐으며, 물가의 조절 및 상인들의 감독, 세금 등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