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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강동성 싸움, 강동(江東)의 역(役) 고려·몽고·동진국의 연합군이 강동성(지금의 평안 남도 강동)에서 거란족을 격퇴한 싸움. 강동(江東)의 역(役)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추격을 피해 고려로 피신해 온 거란족이 강동성에 머물자 몽고와 동진국의 연합군이 이들을 추격해 왔고, 이에 고려는 불가피하게 공동 작전에 임하여 마침내 고종 6년(1219)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이 때 고려와 몽고군 사이에는 형제의 맹약이 체결되었고, 이후 고려는 맹약의 조건에 따라 몽고에 세공(歲貢)을 바쳐야 했다. 고려의 북쪽 축성이 청천강,박강 유역에 집중된 것은 북방민족으로부터 국경선을 수호하려는 고려인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였다. 강동 6주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주요격전지로 거란군을 잘 막아낸 곳이다. 군사·교통상 요지..
강동6주(江東六州) 고려 성종 때 서희(徐熙)와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의 강화회담에 의해 얻은 서북면(西北面)의 6개 주(州).지금의 평안북도 서북 해안지대에 설치하였던 6주즉흥화(興化;義州 동쪽)·용주(龍州;龍川)·통주(通州;宣川)·철주(鐵州;鐵山)·구주(龜州;龜城)·곽주(郭州;郭山)를 말한다. 고려시대 서북면(西北面) 해안지대에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태조때부터 추진해온 북진정책에 큰 장애가 되었다. 그런데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의 제1차 침입 때 서희(徐熙)가 거란의 장군 소손녕(簫遜寧)과 담판함으로써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편입했다. 당시 소손녕은 고려 침입의 이유를 첫째로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자기네의 소유인데 고려가 침식했으며, 둘째로는 자기 나라와 접경하..
갑오경장(甲午更張)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개화파 내각에 의하여 추진된 근대적 제도 개혁.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고도 한다.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민씨정권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이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1884년의 톈진[天津]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청·일 양군이 주둔한 가운데 양국간에 전쟁 기운이 높아지자 조선 정부는 다시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이미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침략의 명분으로서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민씨정권이 이를 내정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자 일본군은 7월 23일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 대원군을 다시 영입하는 한편, 김홍집(金..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 등 개화당이 일본의 힘을 이용하여 청(淸)에 의존하려는 민씨 중심의 세력을 물리치고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일으킨 정변. 계획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의 개국축하연을 이용하기로 하고, 연회 시초에 안국동 별궁에 방화하게 하여 척신들이 왕이 있는 궁궐로 급히 돌아갈 때에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화 계획이 실패하자, 김옥균 등은 즉시 궁궐로 들어가 고종에게청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하고, 일본군의 호위를 청하여 경우궁(景祐宮)으로 국왕을 모셨다. 이어 궁으로 들어오는 윤태준(尹泰駿)· 민태호(閔台鎬) 등 사대당 일파를 살해하고, 다음날인 5일에 각국 공사·영사들에게 신정권의 성립을 통고하였다. 그러나 이때 ..
갑사(甲士)조선시대 오위제(五衛制)의 중위(中衛 : 義興衛)에 속했던 군인. 갑사라는 명칭은 이미 고려 때부터 사용되었고, 조선 건국 초에도 태조가 사병적인 성격이 강한 내갑사(內甲士)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갑사는 수하병적(手下兵的)인 군사로서 사위 임무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그 뒤 1401년(태종 1)부터 왕권 호위를 담당하는 하나의 특수 병종으로 제도화하여 사병적인 성격의 갑사는 국가의 녹으로 운영되는 기간병으로 정착되었다.이리하여 조선 초기에 서울의 시위병으로서, 한편으로는 대외적 변경 방비까지 담당하는 정예병으로서 양계갑사(兩界甲士)가 나타나게 되었다. 게다가 호환(虎患)을 방지하기 위한 착호갑사(捉虎甲士)까지도 설치되었다.갑사에 입속할 수 있는 요건은, 첫째 대부분 부유한 지배계층의 자제..
감은사지3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 통일신라시대 2기(基)의 화강암제 3층석탑. 국보 제112호. 높이 13.4m.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을 갖추고 있는데, 상·하 2중 기단으로 되어 있다. 특히 옥개석의 경쾌한 미와 주위경관에 어울리는 비례가 잘 나타나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 터에 있다.
간쟁, 봉박, 서경 (諫諍, 封駁, 署經) 대성(臺省 - 어사대와 중서 문하성의 낭사로 구성)의 주요 기능. 간쟁은 군주의 옳지 못한 처사나 과오에 대해 힘써 간언하는 것이다. 봉박이란 부당한 조칙을 되돌리는 것이며, 서경이란 문무 관리의 임명이나 법률의 개정·폐지 등에 심사·동의하여 서명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 제도들은 모두 전제 왕권의 규제에 그 주안점이 있었다.
[간도 귀속 문제]간도(間島)는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지역으로, 17 세기 후반 이래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건너가 살았다. 간도는 서간도와 북간도로 나뉘어지는데, 서간도는 압록강과 송화강 상류 지방인 장백산 일대를 가리키며, 북간도는 두만강 북부의 만주 땅을 가리킨다. 흔히 간도라고 하면 북간도를 일컫는다. 넓이가 약 21,000 ㎢로서, 우리 나라 면적의 약 10분의 1 정도이며, 연길(延吉)·용정(龍井) 등 4개 현(縣)으로 구분되어 있다. 일찍이 조선과 청은 서로 합의하여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경계를 정한 바 있는데, 19 세기 후반에 그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간도 귀속 문제가 야기되었다. 즉 비문은, 서쪽은 '압록강(鴨綠江),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을 경계로 정하고 있는데, 청은 토문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