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체 글 (428)
히스토리아
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고구려 멸망 후, 당(唐)의 지배에 저항하여 고구려를 재건하려던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당나라는 평양서을 함락시키고668)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薛仁貴)를 안동도호로 삼아 고구려의 고토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고구려 전역을 9도독부, 46주, 100현으로 나누어 실질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함과동시에 고구려인의 저항을 방지하기 위하여 고구려인 2만 8000여 호를 중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당의 이러한 지배 정책도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이와 같은 고구려 유민의 투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검모잠(劍牟岑)과 안승(安勝)이 주도하였던 고구려 부흥운동이었다.669년 검모잠은 궁모성(窮牟城)을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켜, 왕족인 ..
고구려 5부족 고구려는 원래 5부족의 연맹 왕국이었다. 2세기 태조왕 때 그 중 계루부가 나머지 4부족을 강력하게 통제하게 되었고, 이어 계루부의 고(高)씨가 왕위를 세습하게 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5부는 부족적 전통을 지녀온 것인데, 2세기 후반 고국천왕때는 5부족의 고유한 이름이 없어지고, 그 대신 단순히 동·서·남·북·중의 방향 이름을 가진 5부(즉, 행정적 5부)로 개편된다. 이것은 부족적 전통의 약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를 의미한다. 한편, 고국천왕 때는 같은 왕위 세습이라도 종래의 형제 상속이 부자 상속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도 왕권의 강화를 보여 주는 것이다.
계해약조(癸亥約條) 세견선(歲遣船) 왜관(倭館)계해약조(癸亥約條)1443년(세종 25) 첨지중추부사 변효문(卞孝文)이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정성(宗貞盛)과 세견선(歲遣船) 등 무역에 대해 맺은 조약.내용은 세견선은 50척으로 할 것, 삼포에 머무르는 사람의 체류기간은 20일로 하며 상경자(上京者)의 배를 지키는 간수인은 50일로 한해 이들에게 식량을 지급할 것, 좌선인(坐船人)수는 대선(大船) 40명, 중선 30명, 소선 20명으로 한할 것, 고초도(孤草島)에서 어획하는 자는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의 문인(文引)을 받아 어세(漁稅)를 낼 것 등이었다. 왜인이 개항장에 도착한 후부터 본국으로 귀환시까지 비용은 조선측이 부담했는데, 그 접대비용과 세역미두가 너무 많아 재정긴축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같은 긴축..
계원필경(桂苑筆耕)통일신라시대의 학자·문장가인 최치원의 시문집. 활자본. 20권 4책. 저자는 일찍이 당나라에서 벼슬하였는데, 879년(신라 헌강왕 5) 당의 황소의 난 때에는 제도행영병마도통 고변의 종사관으로, 표장·서계·격문 등 많은 명문을 지었으며, 885년 귀국하였다. 이외에 이 저자의 저서로 사산비명(四山碑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전한다.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신라 제49대 왕 헌강왕 때 최치원(崔致遠)이 중국 당(唐)나라에서 벼슬하며 황소(黃巢)를 치기 위하여 지은 격문(檄文).중국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881년(헌강왕 7) 최치원은 그 토벌총사령관인 고변(高騈)의 휘하에 종군하였는데, 황소가 이 격문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뛰어난 명문이었다..
계림잡전,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계림잡전(鷄林雜傳)신라시대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설화집.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의 저술로 '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郎世記)'·'악본(樂本)'·'한산기(漢山記)' 등을 소개하면서, '계림잡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유교적 관점에서 하찮게 여겨지던 설화집에 지나지 않아 김대문의 저술 목록에서 고의로 제외하였는지도 모른다.화랑세기(花郞世紀)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 김대문(金大問)이 저술한 역사서. 《삼국사기》에 일부 내용만 전하였으나, 1989년 조선 후기 필사본으로 보이는 《화랑세기》가 발견되었다. 총 16장 32면으로 후반부가 일부 탈락되었다. 먼저 화랑의 기원을 밝히고 본문의 서술방식은 가족관계, 행적, 찬(贊)의 순이다. 등장인물은 총 138..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 신라 때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가 신라를 영토화하려고 설치한 기관. 663년(문무왕 3),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면서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이것을 무시하여 고구려·백제의 유민과 함께 당나라의 세력을 물리치고 국토를 통일하였다. 이 도독부 제도는 당나라가 다른 나라에 침입하면 설치하던 기관으로, 당시 백제 고지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경천사10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고려 말에 건립된 대리석 석탑. 국보 제86호. 높이 13.5 m. 원래 경기 개풍군 광덕면에 있었는데 한말에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불법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 후 반환되었으나 파손이 심하여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가 1959-60년에 재건되었고, 다시 1995년 해체된 후 문화재연구소·한국자원연구소·원자력연구소의 공동작업으로 1998년까지 완벽 보존처리하기로 하였다. 석탑의 형식은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신라형식을 이은 평면직사각형이다. 당시에는 이미 새로운 양식인 다각 석탑이 나타났으나, 이 석탑은 그런 유형을 따르지 않은 특수한 형태를 갖추어 이색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經濟協力開發機構 OECD)1961년 경제발전과 세계무역의 촉진을 위해 설립된 국제 기구.Organis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의 약자.회원국간 상호 정책조정과 정책협력을 통해 회원국의 경제·사회발전을 공동으로 모색하고 나아가 세계 경제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정부간 정책 논의 및 협력기구다.미국 마샬 프랜(Marshall Plan)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한 유럽국가간 협력을 위해 1948년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 Organisation for European Economic Cooperation)가 설립되었으며, 1961년에는 미국·캐나다 등이 가입함에 따라 OECD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 뒤 일본·호주 등이 가입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