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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1] 경신환국(庚申換局) 조선 숙종 6년(1680),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된 사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선조 연간에 비롯된 조선의 붕당정치는 현종대의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1674년(현종15년)의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득세한 남인이 권력을 강화하자, 그 해에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영향으로 모후의 족질 김석주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숙종의 편당적 조처). 군권(軍權)을 빼앗아 서인에게 주는 등(유악사건) 숙종이 남인을 멀리하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서인은 당시 영의정인 남인의 영수인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과 인평 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셋째 아들, 효종의 동생)의 세 아들인 복창군(..
* 고려의 경시서(京市署)고려시대 개경(開京)의 시전(市廛)을 관리·감독하던 관청. * 조선의 경시서(京市署)조선전기 호조의 속사(屬司)로 물가의 조절 및 상인들의 감독, 세과(稅課)의 감독을 맡아 본 관청.- 이명로의 얄개수첩 -경시서(京市署)고려 문종 때 수도인 개경의 시전을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영(令) 1인, 승(丞) 2인을 두었으며, 이속(吏屬)으로 사(史) 3인, 기관(記官) 2인을 두었다.충렬왕 때는 영을 권참(權參)으로 개칭하였고, 승을 3인으로 증가시켰으며, 공민왕 때에는 정7품인 승을 강등하여 종8품으로 하였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는데, 1392년(태조 1) 새 왕조를 세운 태조가 모든 법률과 제도를 고려의 것을 계승함에 따라 경시서도 이에 따랐으며, 물가의..
경세치용(經世致用)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 사회의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제도와 방법에 관한 구체적 지식이나 실천적 구현을 포함하고 있는 용어.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 조선 후기 토지개혁과 농민의 생활 안정을 주장하였던 실학파.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에 대응되는 학파로,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익(李瀷)·유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 등을 들 수 있다. 모든 개혁의 기초를 토지제도에 두고 유교의 원전과 고제(古制)를 연구·재해석하여 유형원의 균전론, 정약용의 여전론과 같이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제시되었다. 이와 같은 토지개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정치개편 및 정치 참여층의 확대가 필요하므로 이를 위해 관료제, 교육·행정제도 등을 새로 구상하고 신분차별 등 각종 폐단을 ..
경세유표(經世遺表)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해 관제, 토지제도, 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한 책. 44권 15책, 필사본, 원제명은 이며 1817년(순조17)에 저술되었고 미완성작이다. 관련 :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1919년 10월 김성수가 창립한 방직 주식 회사.경성방직의 설립은 호남·영남의 대지주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따라서 초기의 이사진에는 대지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경성방직의 성립은 근대적 기업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부 대지주의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을 더욱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1920년대 전반까지의 조선인 회사 중 자본금의 규모가 큰 것은 거의 대부분 대지주의 참여 속에서 설립되었다.경성직뉴주식회사(京城織紐株式會社)1911년 5월 서울의 유(紐)제조업자와 일부 자본가들이 설립한 회사. 1917년 경영권을 김성수(金性洙)에게 넘기기까지 조선인 공업회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 중의 하나.
경복궁은 4개(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궁궐 중에서 가장 먼저 영건되고 또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궁지(宮址)는 대체로 고려 3경 중의 하나인 남경의 궁궐자리로 인정되는데, 이보다 좀더 남쪽으로 넓은 터에 옮겨 지어진 것 같다. 권중화 등이 결정한 궁궐기지에 대한 당시의 실록기사를 읽어 보면 「고려 숙종 때에 영건된 궁궐터가 좁은 것을 피하여 그 남쪽에 자리를 잡고 서북방 산인 백악을 주산으로 삼아 북좌남향으로 정하니, 국면이 평탄하고 넓으며, 전방(前方)의 여러 산이 모두 앞에서 조회(朝會)하여 읍하는 것 같았다.」 는 말이 있으니, 이 사실로 미루어 경복궁 자리가 옛날 고려의 남경 궁궐터 남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태조는 천도와 함께 왕 3년 12월부터 제도(諸道)의 정부(丁..
경보(經寶)고려 정종(定宗) 때 불교진흥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장학재단.불명경보(佛名經寶)라고도 하였다. '보(寶)'란, 곧 기금(基金)을 뜻하는 당시의 말로, 일정한 사업을 운영하기 위한 자원을 마련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식 등을 통하여 재단을 지속·운영시켜 나간다. 이 재단은 946년(정종 1) 왕이 불법(佛法)을 배우는 문도(門徒)들을 위하여 쌀 7만 석을 전국의 주요 사찰에 하사함으로써 광학보(廣學寶)와 함께 발족하였다. 이들 장학재단은 그뒤 헌종 때 불경간행기금인 반야경보(般若經寶)가 설치되고, 이어 문종 때 팔관회(八關會)의 의식 기금인 팔관보(八關寶)가 국가기구로서 재정비됨으로써 상호 연계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광학보(廣學寶) 고려시대 불법(佛法)을 배우는 사람들을 위하여 설치한 일종의..
경당(扃堂)고구려시대의 민간 교육 훈련 기관. 〈구당서 舊唐書〉와 〈신당서 新唐書〉에 따르면, 경당은 주로 지방에 거주하는 평민층의 미혼자제에게 경전(經典)과 궁술(弓術)을 가르치는 민간교육기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궁술이 주요 교육내용의 하나였던 점에서 신라의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교육기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사훈련기관으로서의 성격도 짙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을 주목하여, 경당의 기원을 원시적인 촌락공동체 속에 남아 있던 원시적인 미성년집회가 경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민개병제의 원칙에 입각한 군사조직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경당은 상류층 자제를 교육하는 태학이 설립된 372년(소수림왕 2) 이후, 특히 427년(장수왕 15)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