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역사의 흔적 (56)
히스토리아
이미지출처 : 국립중앙과학관(http://www.science.go.kr) ■ 접동새 전설 옛날 그 옛날에 평안북도 박천의 진두강가에누나 하나와남동생 아홉으로 구성된10남매가 홀아비와 같이 살고 있었다네요. 어느 날 아버지가 계모를 들였는데, 이계모는 포악하여 전실 자식들을 많이 학대하였답니다.그러다 누나가 나이가 들어 박천땅의 어느 도령과 혼약을 맺었답니다.부자인 약혼자 집에서 누나에게 많은 예물을 보내 왔는데 이를 시기한 계모가 누나를 농속에 가두고 불을 질렀답니다. 동생들이 슬퍼하며 타고 남은 재를 헤치자 재 속에서 한 마리 새가 날아 올랐갔는데, 이 새를 훗사람들이 접동새라 불렀답니다. 접동새가 된 누이는 계모가 무서워 남들이 다 자는 야삼경에만 아홉 동생이 자는 창가에 와서 슬피 울어댔답니다.한..
내사산(內四山)과 외사산(外四山)태조 3년(1394) 10월 25일 지금의 수도로 정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600여 년간에, 서울은 그 영역에 있어서나 면모에 있어서, 그리고 기능에 있어서 많은 변천이 있었다.이러한 변천을 평면적으로 보면 현재의 광화문 비각을 기점으로 하는 북위 37도 34분, 동경 126도 59분의 위치를 중심으로 전시대를 통하여 반경적(半徑的) 방사선상으로 확대 ·발전하여 왔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서울시라고 하지만 시대에 따라, 그 영역 범위가 대단히 다르다. 여기서는 14세기의 '천도 당시의 서울'과 '오늘의 서울'로 크게 구별하고 양자를 다같이 말할 때에는 그냥 '서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천도 당시의 서울은 대체로 도성내를 말한다. 이를 지형적으로 보면 북쪽의 백악산(..
선돌은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처럼 선사시대의 유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선돌은 의미 있는 대상이었다. 무엇보다도 왕성한 생산력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돌은 마을 공동체 신앙의 중요한 신체(神體)로서 역할을 했다.충북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에는 3기의 선돌이 있는데, 이 중마을 입구의 우측 언덕에 위치한 여근석 선돌은 마치 배가 부른 임신부의 모습을 띠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치 사람의 배에 해당하는 부분에 직경 84㎝의 둥근 원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임신부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왜 돌의 중간부에 원을 형상화했을까. 과연 그것은 단순한 표현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원의 형상은 임신을 뜻하는 것으..
영동 부상리 남근석·여근석 충복 영동군 부상골에는 효자로 소문났던 민대혁(閔大爀)의 정려비가 세워져 눈길을 끈다. 흥미로운 것은 화려한 비각과는 대비되는 초라한 돌탑과 선돌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민대혁의 효자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 말기였다. 민씨 집안은 당시 명성황후의 당질이었던 민병주에 의해 이곳에서 토호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는 농민들에 의한 민란이 자주 일어날 정도로 국정이 문란했던 때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효자비를 세운 것은 민중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효자비 옆에 세워진 돌탑이나 선돌이 민중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부상골에게 탑이나 선돌에 대한 제의는 단절된 상태다. 부상골에서 조금 지나면 큰골이 나타난다. 그런데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거대한 ..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는 은티마을이 있다.은티 마을 입구 커다란 화강암 판석에 마을의 유래가 적혀있다. 사실 은티 마을은 여느 산골 마을처럼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그래서 그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다.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근곡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나타난다. 신라 선덕여왕은 세 가지의 일을 미리 알아냈는데, 그 중 하나가 여근곡에 숨어 있던 백제 병사를 찾아낸 일이다. 즉 겨울인데도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울었다고 한다. 이것을 들은 여왕이 군사를 여근곡에 보냈다. 그곳에는 경주를 습격하기 위해 백제 병사들이 숨어 있다가 전멸됐다. 게다가 이들의 후미에 있던 병사까지 몰살됐다고 한다. 개구리가 우는 것은 남자가 성냄을 뜻하는 것이..
제천은 물론 의림지로도 유명하지만, 송학면 무도리의 공알바위는 그에 못지않게 유명하다.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알바위’로 약 150×100㎝의 크기의 알과 같은 바위가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바위 앞에는 도로가 오래 전부터 나 있었고 철도가 바로 옆에 위치하여 시끄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바위의 안쪽을 유심히 쳐다보니 자갈들이 쌓여 있었다. 이것은 아들을 낳고 싶은 부녀자들이 넣어 놓은 흔적이다. 즉 개울 건너편에서 자갈 3개를 던져 한 개라도 이 바위 안쪽에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리가 족히 20m나 떨어져 있어 바위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도의 수련이 요구될 만하다. 바위 안쪽으로 들어갈 만한 크기도 20㎝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넓지 ..
☞인왕산 선바위 선바위 혹은 입석(立石)이라고 부르는 바위는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길쭉하게 서 있는 바위를 선바위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선사시대 이후 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왜 이들 바위가 주목을 받았는가? 무엇보다도 이들 바위는 땅속에 박혀 있다. 그런 형상 자체도 매우 의미심장하지만, 실상은 이런 바위 형태가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기자(祈子)신앙과 같은 민간신앙의 치성 대상으로만 존재해 왔던 것일까? 인왕산에 위치한 선바위는 국사당을 밑에 두고 있다. 원래 이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를 모신 사당으로 남산에 있었던 것인데, 일제 때 남산에 신사를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국사당 위에 있..
민속으로 보는 性(2) 사람의 신체에 달려 있는 과장된 성기가 보다 많은 생산을 초래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우리 조상들은 거대한 바위에 나타난 성기를 숭상했다. 그리고 이들 바위를 신성하게 모시는 민간신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성기바위, 즉 남근석은 그렇다면 어느 때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았을까? 청동기 시대 이래로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정착생활을 하며 농사를 지으면서 추구하였던 가장 큰 지향점은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수확이 요구되었다. 농사가 잘되고 못되고의 사연은 물론 자연재해로부터 얼마나 피해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자연재해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남근석에 대한 치성행위였다. 즉 많은 결실을 위해 생산력이 강한 남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