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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능산리고분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
예성강곡(禮成江曲) 옛날에중국 당나라상인인하두강(賀頭綱)이라는사람이바둑을잘두었다.그가한번은예성강에갔다가아름다운여인을보고는탐나는마음이생겼다.그는그녀의남편과바둑을두어거짓으로지고는많은물건을건네주었다.그리고이번에는아내를걸고바둑을두자고하였다.남편은이로운일이라고생각을하고그렇게하기로하였다. 하두강은실력을다하여단번에이기고는그의아내를빼앗았다.그리고는그의아내를배에싣고떠나가버렸다.이에남편은후회와한(恨)에차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 노래가 곧 예성강곡이다. 그런데 그부인이떠나갈때에몸을매우죄어매서하두강이그녀를건드리지못했다고한다.배가바다가운데에이르자뱅뱅돌고가지않으므로점을쳤더니지조가굳은여인에게감동이되었으니그여인을돌려보내지않으면배가파선되리라하였다.그래서뱃사공들이두려워하며하두강에게이일을알리자 하두강은그녀를돌려보내주었다고한다. 이에 그녀..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일제강점기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한 농민·농촌 계발운동. 이 운동은 한말 계몽운동에 역사적 맥락을 두고 있다.농민의 의식과 지식·기술 등을 계몽하거나 개발하기 위하여 학생들 또는 학식 있는 지도층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단체를 형성하여 농촌사회에 봉사하는 사회교육적 활동이다.운동의 주체는 농민이 아닌 지식인 학생이므로 성격상 농민들이 주체가 된 농민운동과는 구별된다. 또한 농민의 의식 또는 지식을 개발하는 교육활동이나 학교교육과는 구분되는 사회교육 현상이며, 민족운동의 측면에서는 사회문화운동의 영역에 해당된다.이 운동은 이미 한말부터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나, 식민통치 항쟁기에는 독립기반을 형성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 추진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농촌사회의 근대화를 목표..
농본주의(農本主義)농업을 생산활동의 근본으로 여기는 사상.특히 유교 국가의 생산활동에서 농업의 우위를 내세우며, 더 나아가 사회생활 전반까지 규제하는 사상이다. 전통적으로 유교를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인정하는 문화권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유교는 농업사회를 근간으로 하여 발생하고 발전하였으므로 농업을 생산활동의 중심에 두었다. 즉 농업을 상업이나 수공업 그리고 어업에 우선하는, 모든 산업에서 최상의 생산활동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농업의 우위는 단순히 생산활동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논리로 통용된다. 그러므로 산업활동의 각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 가운데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장 위에 두게 된다(→ 사농공상). 이른바 사민(四民)에서 공(工)·상(商)보다 농(農)을 우위에 두는 것이다..
농경굴지구 땅을 파고 일구는 도구이다.
농가집성(農歌集成) 농사직설(農事直設)금양잡록(衿陽雜錄) 농상집요(農桑輯要)농가집성(農歌集成) 조선 중기의 문신 신속이 편술한 농서 1655년 간행 의 세 농서와 부록으로 가 덧붙여진 합편. 농사직설(農事直設) 농사에 관한 기술을 해설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농법서(農法書). 1책. 목판본. 1429년(세종 11) 세종의 명을 받고 정초(鄭招)․변효문(卞孝文) 등이 편찬하였다. 각 도에 명하여 농부들의 실제 경험을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편찬하였다. 내용은 대부분 중요곡식류에 국한되고 기술이 간단하지만 세종의 농본주의정책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씨앗 저장법, 토질개량법, 모내기 법 등 농사 기술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우리 나라 풍토에 맞는 농법을 제시하였다. 이후의 우리 나라 농서의 모범이 되었다..
녹패(祿牌)조선시대 이조와 병조에서 왕명을 받아 종친·문무관에게 녹과(祿科)를 정해 내리는 증서.기록된 녹과에 따라 호조에서는 녹봉 인수증인 녹표(祿標)를 발급했고 관원은 이 녹표를 가지고 광흥창(廣興倉)에 가서 녹봉을 인수했다. 발급은 태조 때에 삼사(三司)에서 담당하다가 뒤에 이조·병조가 담당했다.☞녹읍
녹봉녹봉제녹읍(祿邑) 신라시대 때 관료에게 직무의 대가로 지급한 논밭. 관료 귀족이 소유한 일정한 지역의 토지로, 수조권(收租權)뿐만 아니라 그 토지에 딸린 노동력과 공물(貢物)을 모두 수취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녹읍제의 실시연대는 알 수 없으며, 689년(신문왕 9) 왕권강화책으로 귀족세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귀족의 반발로 인하여 757년(경덕왕 16) 녹읍제는 다시 부활하였는데, 이는 귀족의 토지지배를 견제하려던 시책이 실패한 것으로 귀족세력이 국가를 능가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하여 신라사회는 장원이 발생하고, 호족화(豪族化) 경향으로 변화됨으로써 국가경제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이 녹읍제도가 부활한 757년은 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