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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경재소(京在所) 조선시대 중앙정부가 지방의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연락기구. 고려시대 사심관과 비슷한 기구이다. 중앙 정부의 고관이 출신 지방의 경재소 임원이 되었다. 선초에는 이를 통해 유향소를 중앙에서 직접 통제할 수 있어, 향촌 자치를 허용하면서도 중앙 집권을 효율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조·성종 대에는 중앙의 훈신·척신들이 연고지의 경재소를 관장하면서 지방 관리와 결탁하여 불법을 자행하였고, 유향소까지 장악하자 지방 사림들이 반발함으로써 사화(士禍)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후 수령의 권한 강화로 유향소의 지위가 격하됨에 따라 경재소도 1603년 선조때 폐지되었다.관련항목 : 유향소
감고(監考)조선시대 정부의 재정부서에서 전곡(錢穀) 출납의 실무를 맡거나 지방의 전세·공물징수를 담당하던 하급관리. 중앙에서는 서리, 지방에서는 향리들이 이 일을 맡았으므로 감고서원(監考書員) 혹은 감고색리(監考色吏)·감고색장(監考色掌)이라고도 하였다.재물과 관련하여 감고색리들의 농간이 심하였으므로, 1418년(세종 즉위년)에는 경기도의 전세 수납에서 감고를 배제하고 3인의 수령이 직접 담당하게 하였으나 업무가 지지부진하여, 이듬해부터 다시 감고색리들에게 맡기게 되었다.전세부과를 위한 답험(踏驗 : 농작물의 상황의 조사)의 일로 경차관(京差官)을 파견할 때도 감고서원들을 수행시켰는데 이들의 농간이 많았고, 지방의 수령들이 전세와 공물의 징수를 위하여 동원하는 감고색리들의 작폐도 심하였다.1472년(성종 ..
거간(居間)타인간의 상행위의 중개 및 토지와 가옥의 매매·임대차·전당의 중개를 직업으로 삼는 중간상인. 거간은 객주(客主)와 함께 전래의 대표적인 중간상인으로 생산자와 상인, 상인과 상인, 상인과 소비자, 국내상인과 외국상인 사이에서 거래를 알선하고 구문(口文, 口錢)을 받았다. 거간의 종류는 활동 방법과 취급 상품에 따라 여러 형태가 있었다.거간이 주거하는 장소가 객주집의 내부인가 외부인가에 따라 내거간(內居間)과 외거간(外居間)으로 나누어진다. 내거간은 객주의 사용인으로 일체의 업무를 담당, 처리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내거간은 다시 동사거간(同事居間)과 노력거간(勞力居間)으로 나누어진다.동사거간은 객주의 자금에 자기의 자금을 투자하고, 또 업무를 같이 보는 자를 말하며, 노력거간은 다만 거래..
경원 이씨 (慶源 李氏) 고려 귀족 사회에서는 혼인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통혼의 대상이 되는 가문의 정도가 자신과 가문의 출세에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고려에서 최고의 가문은 왕실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귀족 가문은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맺으려 하였고, 또한 문벌 간에 상호 중첩되는 혼인 관계를 맺었다. 왕실 외척으로최고의 문벌을 이룬 대표적 가문이 경원 이씨였다. 경원(인주) 이씨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이자연(李子淵)이었다. 그는 세 딸을 문종의 비로 납비(納妃)하였고, 그의 세 아들의 딸이 각각 선종, 순종의 왕비로 납비되었다. 그의 손자 이자겸(李資謙)은 한 딸은 예종비로, 두 딸은 인종비로 납비하였으며, 당대의 명문 귀족들과도 인척 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경원 이씨는 10여 대에 걸쳐 5명의 수..
경영형 부농 경영의 합리화를 통해 부를 축적한 조선 후기의 부농(富農)을 말한다. 농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영농 기술을 개발함과 동시에, 경영을 합리화하여 소득을 높이기도 하였다. 농민들이 의도한 방안에는 많은 농지를 적은 노동력으로 일구어 소득을 늘리는 법과 적은 토지에 소득이 높은 작물을 재배하여 수익을 늘리는 법이 있었다. 전자의 방안을 흔히 광작이라 하는데, 한 집에서 넓은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는 방식이었다. 이앙법과 견종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되어 농민 1인당 경작 면적이 넓어지니까 가능하였다. 후자의 방안으로 농민들은 고소득을 보장하는 인삼, 담배, 목화, 채소, 과일, 약재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였다. 특히 인삼과 담배는 인기있는 상품 작물이었다. 서울 근교에서는 채소 재배가 성하여 농민..
경연(經筵), 서연(書筵) 경연은 국왕이 정치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자성(自省)의 기회를 가지기 위해 학식이 많은 신하들과 경서나 사서를 읽고 토론하는 자리인데, 세자인 경우에는 서연이라 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송나라에서 시작된 제도이다. 우리 나라에 이 제도가 받아들여진 것은 고려 중기로서, 이 때는 간헐적으로 행해지다가 공민왕 무렵에 다소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신하측으로부터 이 제도를 상설화시키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추구되어, 나중에는 왕의 정사의 태반이 이 자리에서 이루어질 정도로 그 비중이 높아졌다. 예컨대, 세종 때에는 집현전에서 국왕과 세자와 강론하는 경연과 서연에 각각 10 명씩의 학자를 배정하였고, 국왕의 정사가 거의 이 곳에서 논의되었던 것이다. 원래..
[1] 경신환국(庚申換局) 조선 숙종 6년(1680),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된 사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선조 연간에 비롯된 조선의 붕당정치는 현종대의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1674년(현종15년)의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득세한 남인이 권력을 강화하자, 그 해에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영향으로 모후의 족질 김석주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숙종의 편당적 조처). 군권(軍權)을 빼앗아 서인에게 주는 등(유악사건) 숙종이 남인을 멀리하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서인은 당시 영의정인 남인의 영수인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과 인평 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셋째 아들, 효종의 동생)의 세 아들인 복창군(..
* 고려의 경시서(京市署)고려시대 개경(開京)의 시전(市廛)을 관리·감독하던 관청. * 조선의 경시서(京市署)조선전기 호조의 속사(屬司)로 물가의 조절 및 상인들의 감독, 세과(稅課)의 감독을 맡아 본 관청.- 이명로의 얄개수첩 -경시서(京市署)고려 문종 때 수도인 개경의 시전을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영(令) 1인, 승(丞) 2인을 두었으며, 이속(吏屬)으로 사(史) 3인, 기관(記官) 2인을 두었다.충렬왕 때는 영을 권참(權參)으로 개칭하였고, 승을 3인으로 증가시켰으며, 공민왕 때에는 정7품인 승을 강등하여 종8품으로 하였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는데, 1392년(태조 1) 새 왕조를 세운 태조가 모든 법률과 제도를 고려의 것을 계승함에 따라 경시서도 이에 따랐으며, 물가의..